시골 가서 오래 오래 머물다 어제 집에 도착 했습니다.

이번 겨울은 시도 때도 없이 오는 눈 폭풍에 움직였다 하면

비행기던 버스던 제대로 된 날에 집에 돌아 오지를 못하고 발이 묶여 버리네요.

 

 

추수 감사절, 크리스마스 중요한 명절 다 떼 먹고

지난 여름 이후로 못 뵌 시부모님하고 오랜 만에 긴 시간 보내면서 즐거웠고

이번 시골행의 목적이었던 남편의 연주 행사가 지난 주에 있었어서

그거 참견하면서 또 잘 놀았고.

 

 

남편이 떡하니 내복입고 무대에 서는 바람에

초장부터 저는 술을 이것 저것 섞어서 마구 퍼마시고.

지금 그 시골 동네에 이제 소문 다 났을 거예요.

그 밴드 기타 치는 사람 부인, 술쟁이라고.

 

 

남편이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본 게

이번이 딱 두 번째였는데

처음은

몇 년 전에 고향 친구 아버님 구순 잔치에서.

야외에서 드럼없이 기타만 단촐히 한 거였고

실내에서 어설프게나마 조명이라도 있고

제대로 사운드 시스템 갖춰 놓고 연주하는 건 이번에 처음 봤어요.

 

 

 

집 떠나기 전 날 짐 꾸리다

그 날 내가 어떤거 입었으면 좋겠냐고

옷 몇 가지 갈아 입어 가면서 보여 주고,

나는 그냥 내조의 여왕 중의 여왕이다....이러면서

남편이 콕 찍은 걸로 순순히 가방에 넣고.

 

 

그 동네 얼마 전에 불이 나서 집을 잃어버린 어떤 가족을 위한

베네핏 이벤트였거든요.

시작은 오후 2시 반부터 해서 7시가 남편 밴드가, 그러니까 명색이 헤드라이너, 메인 이벤트인지라

 

 

 

아....또 이 부담감....

남들 아무도 단 한치도 개의치 않는,  나 홀로 도취해서 느끼는 이 무지막지한 부담감.

나는야 메인 밴드의, 리더의, 와이프.

멋있게 보여야 한다..

평소에는 일년 365일 나 입고 싶은대로 입는 옷이지만

그래, 이 막중한 존재감과

이건 남편의 이벤트이니까,

남편이 좋아하는 걸로다 그래 까짓거 입어 주지 뭐.

 

 

 

남편이 콧노래를 부르면서 찍어 준 그 의상을 챙기면서

저는 예상은 했었어요.

조금은 멋적게 될거라는 걸.

술집도 아니고 시골 동네 마을 회관같은 곳이라 어린 아이들도 다 참여 가능한 행사였어서

대충 다른 사람들은 어떤 차림으로 올 것이라는 걸.

 

 

 

어쨌든 내 의상은 정해졌고

나는 그 것을 짐 가방에 챙겼고

그 날 그 것을 계획대로 입었고

 

 

 

메인 이벤트를 장식한 남편은

깔맞춤 내복을 입고 무대에 섰습니다.

 

 

 

 

 

 

 

연애 시작하고

둘이 어떤 속옷을 입는지까지 알게 된 사이가 되었을 무렵,

이미지 관리를 위해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라고 뻥을 치고 싶지만,

관리할 이미지 자체가 없는 고로,

 

 

 

여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후

20대 후반의 팔팔한 미국 남자가

내복을 입는다는 사실 자체에 충격을 한 번 받고

그 내복의 질이

물도 안 먹게 생긴 걸레로도 못 쓸 만큼 후진 나이롱 쪼가리라는 것에 또 한 번 충격을 받고.

그런 걸 내복이라고 대체 어디서 구해서 입는 건지,

마지막으로 새로 구입한 건 언제인지,

정말 혼란 스러웠었어요.

 

 

 

이걸 문화 충격이라고 하면

다른 멀쩡한 미국 사람들이 불쾌할 테니까...

그냥 이 사람, 이 남자한테만 해당되는 인간 충격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리하야,

제가 언니들한테 이 사실을 떠벌리고

충격 반, 신선함 반, 더하기 보나스 불쌍함 반,  이런 저런 복합적인 이유로

한국에 있던 큰 언니로 부터 한국 내복을 공수 받았는데

 

 

 

남편은 여기서 일생일대의 '경이로운 한국 내복'이라는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어쩌면 이렇게 면이 좋으냐,

두껍고 따듯하고,

자기가 가진 스웨터들보다도 훨씬 좋고,

외출복으로 입어도 손색이 없겠다며

방긋방긋 웃으며 너무나 행복해 하기에

내 남자 친구가 행복해 하는 모습에

이쁜아짐도 덩달아 행복해 집니다.

이 남자가 내복을 내복 본연의 기능으로만 국한 했더라면

여기서 깔끔한 해피 엔딩인데..

외출복으로 입어도 손색이 없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거예요.

 

 

 

연애 시작하고 두번 째 맞는 발렌타인즈 데이 때

외식하러 갔더니만

가죽 자켓 안에 떡하니

달랑 내복.

 

 

 

자켓 벗어서 의자에 걸쳐 놓고

내복 입고 앉아서 밥을 먹었지요.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부여 잡고

행복하다, 사랑한다, 해피 발렌타인즈 데이, 이러고 떠드는데

저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도 못하고

행복에 취해 입에 귀에 걸리고 콧구멍 벌렁 거리면서 쉴 새 없이 사랑을 고백하는 저 남자의

백양 에어메리 105호를 쳐다 보면서

 

 

 

지금이라도 이 사랑을 돌이켜야 하나 어쩌나 머리 속이 복잡했었습니다.

 

 

 

지난 주에 15년여 전 그 날의 악몽이 재현이 되면서..아아...

 

 

 

행사 당일 아침에

무대 의상이라고 샤워하고 나서 갈아 입겠다며

정성 들여 침대 위에 내어 놓은 것을 보니

위 아래 한 벌 내복에 구멍난 청바지.

 

 

이번 거는 보자...

 

 

한일합섬

HEE MANG

SIZE 105호

 

 

레이블에 이렇게 써있군요.

 

 

 

컨츄리 스타일 복장이라고 롸커의 느낌이 살게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며

의기 양양하게

가족들 앞에서 의상 설명.

찢어진 청바지 틈새로는 물론 위 아래 깔맞춤된 하얀 색 내복 바지가 보이고.

 

 

 

 

마누라는 이 엄동설한에 끈달이 원피스 입혀 놓고

지는 내복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한다고라...

 

 

 

아 머리야...

 

 

 

원피스 위에

이번에 패션 디자이너 친구가 새로 가져다 준

이번에도 완전 내 몸에 맞춤 제작한 것 같은

얇은 라이더 스타일 가죽 자켓을 입고

평소에 눈, 비 피해서 제일 아껴 신는 부츠도 큰 맘 먹고 신고

파우치까지 구색 맞춰 옆구리에 날렵하게 끼고

역시나 남편 바램대로 풀어 헤친 머리에 큰 링 귀걸이를 흔들며

 

 

 

살랑 살랑

시골 동네 마을 회관으로 입장 했더니만

십분 전까지 눈 치우다 삽만 내던지고 바로 온 것 같은 차림 일색인 사람들이 모여있고

난 혼자 맨하탄 클럽 차림이고.

애기들이 막 나 쳐다보고.

저녁으로 제공된 스파게티 드시고 계시던 동네 어르신들 다 쳐다 보시고.

기타 들고 씩씩하게 무대로 향하는 남편은 자켓 벗어 던진 내복 차림이고.

 

 

 

이래서 어쩔 수 없이 또 과음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술이라도 마셔야 내가 지금 이 순간을 견딜 수 있다..

언능 마시자..

빨리 마시자..

일단 취하고 보자.

 

 

 

술 들이 붓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잘 놀긴 놀았어요.

막내 시누가 제 옆에 딱 붙어서 챙겨 줘서 아무 걱정없이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같이 춤추고 웃고 떠들고.

보통 때는 많이 부담스러운 동네분들과의 인사도 다 즐겁게 나누고

술 들어가면 영어는 또 왜 그리 유창해 지는지 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너무 상냥하고 발랄하게 대화 나누고.

 

 

 

심지어 잠깐

집에서는 성질 나쁜 마누라 비위 맞추느라 전전긍긍하는 머슴같은 모습만 보이던 남편이

조명 아래서 밴드 멤버들을 리드하며 기타치는 걸 보니까

촛점 흐린 눈으로 봐서 그런가..조금 멋있어 보이기까지 하더군요.

이래서 사람들이 술 먹으면 사고를 치는 건가 봅니다.

 

 

 

다음 날,

당연히 술병 났고요.

럼 앤 토닉으로 시작했다 라임을 넣어 주는게 아니고

라임 쥬스 믹서가 들어가고 다크 럼도 없다 하여 라잇 럼으로.

에이 이게 뭐야,

이러고 짐 빔 앤 진저 엘로 갈아 타서는 연거푸 두 잔 마시고

그 다음에

맥주는 파인트가 2불이라길래, 옴마 싸다, 왜 괜히 비싼거 마시고 있었지 이러면서 갈아 타서

후다닥 두 잔 마시고

그러고 나서는 마침내 남편 연주가 끝나서 남편이 맥주 한 잔을 또 받아다 주길래

저건 다 마셨는지 엎었는지 기억에도 없고

집에 와서는 술 마시면 꼭 뭔가를 먹어야 하는 여전한 술버릇으로

낮에 먹다 남긴 볶음밥 한 그릇 후다닥 데워 먹고 잤어요.

 

 

 

다음 날 아침

막내 시누와 남편과 함께

전 날 밤 후기를 나누는데

술을 섞어 마셔서 술병이 났다 보다고 시누가 그러더라고요.

연주하느라 마누라가 무슨 술을 얼마나 어떻게 섞어 마셨는지 몰랐던 남편한테

쭈욱 읊어 주고 나니까

 

 

 

부인,

행사장으로 가시기 전에

집에서 드신 것도 치셔야지요.

칵테일 타임에

진 앤 토닉 하고

저녁 드시면서 레드 와인 드셨잖아요. 대자로..

 

 

 

헐...

미쳤나 봐.

그건 까먹고 있었는데

무슨 일곱빛깔 무지개 엮듯이 섞어 마셨네...

 

 

 

아 그러니까 다음 부터는 제발 내복입고 그러지 말라고.

이거 담판을 짓던지 해야지.

이런 생각을 머리 속으로 하고 있던 찰나,

 

 

 

 

아무리 미국 사람들이 면전 칭찬에 후하다 하나

남편 식구들은 참으로 그 정도가 출중하거던요?

남편 포함,

내가 저 집 식구들한테 하도 후한 말을 시도 때도 없이

지난 세월 많이 들어 왔어서 잘 아는데

저한테만 그런 건 아니고

저 집 식구들이 워낙 그래서

서로한테 다 그래요.

정도가 지나칩니다.

 

 

 

막내 시누가

어젯 밤 연주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어쩌고 저쩌고 좋은 말은 다 갖다 부치면서 오빠 기분을 띄워 줍니다.

 

 

 

너무 멋있었다는 거예요.

그 나이에 몸 관리 이 정도로 된 남자 보기 힘들다며 어쩌고 저쩌고

(시누, 저 배 정녕 안 보여?)

모자도 귀여웠고

어쩌고 저쩌고 어쩌고 저쩌고

(내가 그냥 다 흘려 듣는게 속 편하지)

 

 

 

그러다 하는 말이,

 

 

 

의상으로 내복도 아주 좋았다고.

정말 질 좋고 모양 좋은 한국 내복이라고...

그런 내복 입은 사람은 이 동네 오빠 밖에 없을 것이며 정말 행운아라고...

다음에도 계속 한국 내복입고 무대에 서라고...

 

 

아 진짜,,,

이 가족 답이 없다.

 

 

술병 난 그 아침에

저는 속이 더 미식 거리는 것 같아서

그 자리를 떠서

혼자 수제비나 끓여 먹으려고 부엌으로 향했어요.

 

 

시댁 부엌에 있는 걸로는 해장할 만 한 거라곤 저거 밖에 없겠더라고요.

반죽해서

호박이랑 감자 썰어 넣고 시어머니 쓰시는 치킨 브로쓰 파우더 넣고 후다닥 끓여서

양념 간장 대충 만들어서 먹고 있자니

아버님이,

나도 조금 먹으면 안되겠니?

하셔서

드렸더니

 

 

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다 있냐고

나이 팔십 넘어서 이제서야 이런 걸 먹어 본다고 또 억울해 하시길래

 

 

아버님, 예전에 제가 해드린 적 있는데요.

몇 년 되긴 했지만.

 

 

했더니

 

 

아...어쨌든 팔십 평생에 겨우 두 번째 아니냐.

인생이 억울하다...

 

 

이 가족은,

한국 내복과 수제비에

그냥 행복의 도가니가 되어 버리는 이 가족은,

내가 조금 얼굴이 팔려도 그냥 안고 가야 할 지금은 내 가족.

접시에 남은 양념 간장을 마지막까지 손가락으로 쪽쪽 찍어 발라 먹고 나서

뭐뭐가 들어 갔는지 양념 간장 레서피를 받아 적는

(아니 이게 무슨 레서피 씩이나 ㅋㅋㅋㅋㅋㅋㅋ)

막내 시누도

그냥 다 지금은 내 가족.

 

 

자기는 내복이 딱 한 벌 밖에 없다면서

남편 내복을 부러운 듯이 만져보고 또 만져 보고 한 하와이 살다 온 울 막내 시누.

언제 한국 마켓 큰 곳으로 나가면 한국 내복 한 벌 사줘야 할까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