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거시기 하죠?


지금 저것들이 살려나 어쩌려나 노심초사 하고 지켜보는 중이예요.
사람이고 동물이고 식물이고 받아 나온 생명 쉽게 포기하지 않고 싸우기는 마찬가지 같아요.


봄이 왔는지를 실감하려면 동네 꽃가게에 모종들이 나왔나가 바로미터인데
뉴욕은 아직 봄이 아니예요.
저희 동네 꽃가게에 모종은 4월 말이나 되야 나오거든요.


4월 초에 여기 또 눈 내려가지고, 그 날 누군가와 약속이 있던 날이어서 집을 나서니
눈이 아주 소담스럽게 내리더군요.
그래서 회사에 있는 셋째 성한테 전화해서,
간단히 한 마디.


눈 온다...X발...


내가 뉴욕에 왔던 첫 해 4월에 눈 내렸었고, 제 기억엔 또 올 해가 두 번째 인것 같아요. 제 기억이 맞다면.
18년 만에 뉴욕에 내리는 4월의 눈...18...


어쨌든, 봄은 아직 오지 아니 하였고
동네 꽃 가게에 모종은 아직 도착하지 아니 하였는데
이쁜아짐의 마음에는 봄바람의 훈기가 이미 불고 있으니, 그것의 정체는,
채소가게에 저녁 반찬 거리로 나온 베이즐 되겠습니다ㅋㅋㅋ


지난 주에 시부모님이 시내 내려 오셔서 비어있는 맨하탄 친구 분 댁에 일주일 계시다 가셨는데
하루 저녁 저희가 거기 가서 저녁 먹기로 했었거든요.
나가서 사 먹기도 그렇고, 거기가서 뭘 해 먹기도 그렇고 해서
(집주인인 시어머니 친구 분이 집에서 요리를 전혀 안 해드시는 분이라
참...머시냐...냄비 하나도 없도 도마도 없더군요.
전 아무리 집에서 밥 안 해먹는 집이라고 해도 도마도 없는 집은 처음 봤습니다)
제가 음식 하나 해 가겠다고.
신랑의 요청으로 꼬리곰탕 했어요. 그래서 밥이랑 김치랑 다진 파랑 다 싸들고 맨하탄 94가로.


밥 먹기 전에 항상 시아버님은 칵테일 타임이라는 걸 즐기시는 고로,
안주로 시부모님 좋아하시는 카프레제나 할까? 했더니 신랑도 너무 좋아해서
모짜렐라 치즈, 토마토, 베이즐, 식빵도 챙겨 갔는데,
(식빵은 브로일러에 구워서 네 등분 하고, 그 위에 적당한 크기로 자른 토마토, 모짜렐라, 베이즐을 얹고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 오일을 섞은 소스를 대충 접시 곳곳에 뿌려내면 끝)


토마토랑 베이즐 산다고 채소 가게 갔더만,
옴마나, 다른 허브들은 다 뿌리가 깨끗하게 잘라진 상태로 진열돼 있는데
파슬리, 실란트로, 딜, 로즈마리, 테라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베이즐 한 단에 $1.99 하는거 집어 드니, 베이즐만 유독 뿌리가 조금씩 남아있는 거예요.
흙도 뭍어 있고요.


그래서 잎이 실하게 붙어 있던 베이즐 한 단을 사다, 그 날 저녁으로 먹을 것 다 떼고요,
신랑한테 보여 주면서,
근데 이거 뿌리가 아직 있는데, 이거 심어보면 어떨까? 물었더니
신랑도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 쳐서 둘이 당장 나가서 흙 사다가, 이렇게 올해 화분 농사 시작했네요ㅎㅎㅎ


작년엔 모종 사다 심었었는데...
사 올 때만해도 그렇게 싱그럽고 예쁘던 애기 베이즐들이
한 동안은 잘 자란다 싶더니만...
결국 죽었고요.


그리고 남편하고 부부 싸움 대판하고 마음 가라 앉힌다고 나갔다 사 온 로즈마리 모종.
이것 역시 집에 와서 분갈이 하자 마자 일주일도 안되서 바로 죽었고요...
동네 99전 스토어에서 싸구리 흙 사다 부었더니 흙 안에 이상 야릇한 곤충 알 같은 것이 엄청나게 많이 보이던데
흙이 불량품이었던 건지 뭔지...


잘 키우려고 사 왔는데 내 손에 죽어 나갔을 때, 그 죄책감이 상당하더군요.
개나 고양이 키우다 죽는 것만 마음 아픈 것이 아니라
어쨌든 누구의 집으로든 가서 '살아 남으라는' 전제 하에 나온 것들이 저 모종들인데
생명이 죽어 나갔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
심리적 휴우증이 꽤 컸어요.


그래서 올해도 화분에 무엇인가를 키워 보고픈 마음은 있는데
또 모종 사다 두어 달 만에 죽여야 하나 어쩌나를 고민하던 차에,
채소 가게에 나와있는 베이즐을 사다 심어 놓으니,
저것들은 어차피 그 날로 가서 요리해 먹으라고 나온 것들 이잖아요?
어디가서 다시 뿌리 내리고 살아라, 하는게 아니고.


내가 요걸 살리면 좋은 거고 죽는다 해도 그리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 한 번 해보자! 하고 심었어요.


흙은,
제가 다시는 99전 스토어에서 흙 안 산다고 작년에 결심한 지라
돈 좀 썼습니다. 동네 드럭스토어에서 유기농으로 사 왔습니다.
겉표지에는 무슨 무슨 영양분이 잔뜩 들어 있다고 써 있고, 석 달 유지 된다고.
석 달 후에 착실히  새 흙 한 봉지 사다 갈아줘야지 결심하고 화분에 심었어요.


마침 부활절과 때를 맞 물려 있던 지라,


그래 채소 가게에 나와있던 너희들, 이 화분에서 한 번 새 생명을 받아 봐. 잘 견뎌 보라고~


첫 날은 가지들이 축축 쳐져서 전 오늘 내일로 죽으려나...
역시...키우라고 나온 것과 먹으라고 나온 것은 상태가 많이 틀린거겠지...? 했었는데
16일에 심었으니 오늘로 딱 일주일.
아직 다 살아는 있어요.


그냥 내 눈으로 보면 이것들이 살아낼건지 죽을건지 잘 구분이 안 갈 것 같아서
기록 사진 찍는다고, 매일 매일 사진 한 장씩 찍고 있고요.


옆에 곁다리로 파는, 역시나 채소가게에서 사온 것인데
냉장 보관보다 흙에다 박으면 산다고, 그렇게 해 놓고 하나씩 뽑아서 먹으면 된다고 누가 가르쳐 줘서 해 봤더니
파는 정말로 죽어나가는 법이 없더군요.
굉장히 강해요.
한 단 사다 심어 놓고 계란찜 해 먹을 때 위에 잘라서 먹으면 또 금새 자라고
간장 양념장 할 때 또 위에 잘라서 해 먹으면 다시 금새 자라고.


그런데 지금 저 파들은 보통 때 파는 것들보다 뿌리 부분이 거의 다 잘려 나간 채로 있던 거라
뿌리가 충분치 않아서 고군 분투 중인 것 같은데
다행히, 죽지는 않고 있어요.


오늘은 화분에 흙이 모자라는 것 같아 한 봉지 더 사다 흙도 더 넣고
공기 들어가라고 솎아 주면서 보니까
뿌리 키우고 있더군요.
시들어 가는 듯이 보여도 그간, 일주일 동안, 시름시름 하면서도 뿌리 키워 내오고 있었어요. 살겠다고.


어차피 때 되면 내가 다 뜯어 먹고 뽑아 먹고, 잡아 먹는게 수순이지만,
지금 당장 저 화분 속의 베이즐과 파,
그래, 계속 싸워라. 힘들지? 그래도 뿌리 내리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
아침마다 커피 마시면서 화분 쳐다보고 얘기하고 있어요.
겉으로 소리내서 중얼중얼 대면 정신 병원 후보자처럼 보일테니 혼자 속으로ㅋ


힘들어도 살아야 하는 것,
조건이 충분치 않고 열악할수록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이기도 하고 너희들의 인생이기도 하겠지.
나 역시 빨리 저 세상으로 힘차게 나가서 일해서 밥 값을 해야 할테고,
너희들도...
그거 올개닉 흙이다...밥 값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