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일 하고부터 생긴 좋은 변화들 중에 한 가지.
'집에서 부리는 짜증'이라는게 일체 없어졌다는 거.
이 점은 본인인 저나 남편,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라
둘이 무척이나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녔던 직장이..그게 그만둔 것이 4년 전이고,
제가 결혼하고 딱 한 달 조금 넘었을 때 시작해서 2년 반 정도 다녔어요.


신혼 생활 기간이 딱 그 직장 생활 기간과 맞물려 있습니다.


적성에 안 맞는 건 처음부터 알았지만
급여..큰 돈 아니고 남들 보기엔 우습겠지만 저한테는 감사한 액수였고
9-5 칼출근 칼퇴근에, 의료 보험이니 여타 복리 후생 조건이
미국에서 가장 좋다는 공무원이랑 거진 비슷한 수준이었어요.
공무원처럼 좋지는 않았어도 일반 중,소 규모 회사 보다는 훨씬 더 좋았어요.
거기서 은퇴 연금이라는 것도 해보고

겉으로 보이는 조건은 정말로 안정적이고
내가 그만두지 않으면 누가 나가랄 사람도 없고
그 일도 철밥통 비슷한 일이었는데
그 회사 다니던 2년 반이
저는 그렇게 불쌍하고 그렇게 불행해 보일 수가 없이
매일을 소가 도살장 끌려 가는 모양새로 출근을 했더랬습니다.


적성과는 완전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제가 저 2년 반 동안 몸소 겪으면서 배웠어요.


하루 종일 불행한 일과를 소화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 때 부터는 신혼 때 다들 한다는 남편과의 사소한 부부 싸움.
그런데 말이 부부 싸움이지
제가 일방적으로 미친 소 날뛰듯이 퍼붓고 남편은 고개 숙이고 경청한 다음에
무조건 미안하다는 말로 마무리 하는,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모양새의 싸움이었어요.


저 사람이 그 시절 저걸 다 어떻게 받아 주고 살았나...


참을성이라고는 도대체가 없는 제가 저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2년 반씩이나 다닌 이유는 오로지 하나,
이제 결혼한 사람이니 나도 이 가정의 반의 가장이다,
라는 책임감 하나로.
직장을 예전처럼 쉽게 그만두고 그렇게 살면 안되겠다, 하는
이제는 나는 가정을 가진 사람이니까
나 하나만 어떻게 대충 살면 되는게 이제는 아니니까.


동기는 저렇게 기특하게
그래서 꾸역꾸역, 썩은 동아줄 부여잡고 암벽 타기 하듯이
그렇게 저 직장을 다니다가


마침 회사에서 저희 부서 전 직원을 더 이상 위성 오피스 근무를 없앤다고
본사에 다 자리 만들어 놨다고 본사 출근 하라길래
그렇게 되면 출퇴근 시간이 왕복 두 시간에서 세 시간으로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때 쯤에 마침 남편 월급이 좀 올랐었어요.
그래서 둘이 머리 맞대고 이래 저래 상의 끝에 제가 그만 두는 걸로.


그게 4년 전이죠.


처음엔,
마냥 좋았죠.


거짓말 안하고 거진 6개월을
지하철 타고 어디 밖에 안 나갔습니다.
집에 있는게 너무 좋아서 집과 동네를 안 벗어 나고
쌀도 비싼 값으로 동네 채소 가게서 사다 먹고.
사람들하고 안 부대껴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철저히 집에서만 있었어요.

그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거의 매일 저희 집에 놀러와서 그 친구랑 저녁 때 맥주 마시고 밥 먹고 그랬는데 그 친구가 그 때 그랬죠.


은둔 생활이 너무 길어지는데?
무슨 문제 있는거 아니야? 대인기피증 같은거?
집 밖으로 안 나가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려고?


처음 반 년은 정말, 집에 있다는 사실을 십분 즐기면서
아파트 문 꽁꽁 닫아 걸고 나 혼자 집에서 책보고 신문보고
아...자아실현? 자아실현은 이게 자아실현이지.
사람들 안 부대끼고 사니 이렇게 인생이 편한것을...


그러다 처음 반 년이 지나고는
제 생활이 어땠냐 하면,


하루 종일 컴텨끼고 인터넷에서 방황하고 있는 거예요.
딱히 재밌어서 찾아가는 곳도 없고
뭔가 궁금해서 더 들여보는 이런 것도 없이
그냥 컴터만 끼고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시간만 죽이는...
클릭질을 너무 해대서 손목 아프고 손가락 아플 때까지.


나는 살림을 잘하는 여자도 아니었던 거예요.


청소도 하기 싫다고 안 해.
빨래도 귀찮다고 미루다 미루다 손빨래라도 해야 할 시점에서야 겨우 해.
저녁 밥 한 끼 겨우 해 먹이고 하루 잘 보냈다고 남편한테 생색 내.


그렇게 보낸 3년을 돌이켜 보니
저는 저렇게 살 때도 '짜증'과 '신경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하루 하루를 의미있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자책을 안에 감춰 두고
겉으로는 뭔가 자기 합리화를 해야 할 구실이 필요 했으니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온 사람한테,

오늘은 여기가 아팠네, 저기가 아팠네,
뭘 하려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냥 말았네,
저녁 밥 하느라 내가 애 많이 썼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남편이 조금이라도 뭔가 내 비위에 안 맞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바로 짜증에 신경질 내고.


어쩌다 노여사한테 남편 흉을 좀 본다고 뭔가 시시한 꺼리로 얘기를 시작했더니
노여사 왈,


호강에 받쳐서 요강에 똥 싸는 소리 하고 앉았네. 시끄러!!!!


이제 석 달 정도 있으면 저희 결혼 7주년 기념일이 있는데
결혼 생활 6년을 넘게 하고야 저는 이제 막
진지하고도 올바른 태도로 이 결혼 생활에 대한 책임감을 행동으로 실천하기 시작했는데
우스운 건

지난 일년여 동안, 제가 제일 많이 들은 소리는,


너 대단하다...


셋째 성이, 너 속 안 뒤집어지냐, 어떻게 그렇게 남편을 그냥 놔두고 있냐,
그러길래,


속이야 나도 뒤집어 지는데, 그런데 가만 안 놔두면 어떡해.
싸움 밖에 더 해?
싸워서 해결될 일이면 내가 백 번이라도 하지.
그런데 싸워서 해결될 일이 아닌데 여기서 맨날 싸움까지 하면서 살라고?


그랬더니 셋째 성이 저더러 내 동생이지만 너 참 대단하다, 나 같으면 그렇게 못한다, 이러더군요.
이 얘기를 또 친구한테 해줬더니 웃더라고요.


사실 나도 언니가 대단하다고 생각해~ㅎㅎㅎ


지금은...
이 대단한 이쁜아짐이 일 시작하고 두 달여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일주일에 쉬는 날을 사흘이나 나흘로 잡고 시작한 일인데
사정 상 제가 더 뛰어 나갔어야 하는 날들이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제 몸 상태 걱정을 해주고, 저 역시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와서는
체력은 잠으로 보충한다고 픽 쓰러져 자는 날도 많았고.


그래도
남편이 일하고 제가 집에 있을 때 보다
제가 일하고 남편이 집에 있는 지금
저희 집, 살림 돌아가는 상태가 훨씬 양호합니다.


원래 청소는 남편이 더 꼼꼼하게 잘하는데, 정말 매일 매일 거실과 방을 물걸레질을 하고요 ㅎㅎㅎ
제가 설거지 하는 것도 싫어 하지만
씽크대에 설거지 쌓여 있는 건 더 싫어 하는데
제가 집에 들어 왔을 때 여태 씽크대 항상 깨끗하더군요.
집에서 밥 먹고 있어 달라는 약속, 잘 해주고 있고,
제가 은행가는 일도 정말 귀찮아 하는데

어? 엄마한테 돈 부치는 날이다.

이러면 바로 그 날 가서 하고.

제가 청소하는거 싫어하는 것 만큼 남편은 빨래방 가는 걸 싫어해서
이것 만큼은 쉬는 날 제가 같이 해요.
남편이 빨래들 수거해서 카트에 실으면 둘이 함께 빨래방 가서
하얀 옷, 색깔 옷 나눠서 담고 나면
남편 집에 들어가 있으라 하고
다 된 옷 예쁘게 잘 개서 카트에 담는 것 까지 나머지 과정 다 제가 하고
그러고 전화하면 남편이 나와서 카트 끌고 같이 집으로.


나는 나가서 일하고
돈 번거 남편 가져다 주기만 하면
나머지 귀챃은 집안 살림은 다 남편이 하니
이 생활이 생각보다 참 편하고 할 만 하네요? ㅎㅎㅎ


불평이니 불만이니 짜증이니,
낼 일이 없어요.


지난 주말에 저번에 말했던 그 무대 생활, 잘 하고 돌아 왔어요.
이번 주 부터는 자기도 자기 일 찾는데 좀 더 열심히 하겠다고
오자마자 저한테 너무 미안해 하길래,


마눌이 돈 잘 버는데 무슨 걱정이삼~


하고 발랄하게 받아 쳐 줬는데,
사실 돈은 좀 더 들어 와 주면 제가 훨씬 걱정을 덜 해도 되긴 한데
이대로도 괜찮아요. 해 보니깐.
남편이 빨리 뭘 조금 더 돈을 제 손에 쥐어 주게 되면 금상첨화고
그 일이 좀 더디게 된다 한들
제가 굳이 안달복달 조바심 내야 할 정도는 아니예요.


앞으로 좋은 일 있겠죠...앞으로 좋은 날 오겠죠...

이런 말들
제가 지난 일년여간 마음 속으로 많이 했었는데,


오늘은 이 말이 하고 싶어요.


지금 이대로도 좋다.
더 좋아지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도.


남편은 또 부지런히 아침부터 볼 일 보러 나갔고요.
저는 남편 나가자 마자 커피 내리고
이렇게 내 칼럼도 쓰고 있고
빨래는 그저께 진작에 해 놨고
저녁엔 친구 부부랑 저희 동네서 다음 주에 있을 신랑 생일 축하 겸 외식도 하기로 했고
일 시작하고 무려 두 달 넘게 한국 마켓을 못 가서
집에 김치 떨어진 지가 두 주가 되가는데
이번엔 배추 사다 김치 못 하겠다, 좀 쉬어야 겠다 했더니
친구가 집에 있는 김치 덜어서 가져다 주겠다 하고.


여기서 더 좋아질 게 또 뭐가 있나요. 그쵸?


돈 버니라 몸이 고된거야 그건 당연한 일이니 말할 필요도 없고
이렇게 잘 버텨주고 있는 제 몸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매일 매일 오늘도 잘 해냈어, 하고 제 몸에 감사 인사 꼭 합니다ㅋ


지난 주에는, 백 투 스쿨 기념해서 학년 별 차등지급으로
얼마 안되는 액수지만 처음으로 조카들 네 녀석한테 금일봉이라는 걸 돌려 봤는데
제일 어린 녀석, 4학년 짜리 봉투에는 5불 들어 있었는데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네요.
애들이 아직 돈을 모르는지, 5불 줘도 저렇게 좋아하네요ㅎㅎㅎ
이모가 돈 버니까 너그들도 좋지?


남편은 하루 종일 걸리는 볼 일이라 오후 네 시 넘어서야 집에 올 예정이고
저는 좀 더 안정을 취하고 게으름 피면서 쉬다가, 아니면 낮잠을 자던지,
남편 집에 들어 오면 꽃단장 하고 저녁 먹으러 나가면 됩니다.


가기로 한 식당은 집에서 채 두 블락도 안되는 곳에 있지만
성심성의껏 제일로 아끼는 원피스도 입고
기분 봐서 챙이 큰 모자도 뒤집어 쓰고 나가던가.
가서는 와인소스 홍합과 씨푸드 파스타를 시킬 거예요.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가...남편은 장래 유망한 스물 여덟 건실한 청년이었는데
다음 주면 마흔이예요. 세월 빠르다...


나랑 사니라 욕 많이 봤다 신랑.
오늘 저녁은 돈 잘 버는 마눌이 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