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에 뉴욕에 무사히 도착.

토, 일 이틀간 낮이고 밤이고 자면서 시차 적응 마치고요.

월요일 부터는 낮잠 안 자고요, 초저녁에 잠이 쏟아 지길래

내가 피곤하기는 한갑다, 하고 일찍 잤더니

새벽 3시에 눈이 딱! 떠지는 거예요.

말똥 말똥한 정신에 어거지로 누워 있는게 더 힘들어서

화요일 부터는 새벽 다섯 시에 자리 털고 일어나서 동네 공원으로 갔네요.

 

 

24시간 하는 던킨에 가서

라지 커피랑 도넛 2개, 캄보 메뉴로 세금 포함 3불 6전. 와 싸다!!!

한국에서 스몰 싸이즈 커피 달랑 한 잔에 3천 3백원. 흐미나…

스타 벅스 비싼거야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서민 커피인 우리의 던킨까지 저렇게 비싸면 어쩌자는 겐지.

그래도

내가 한국에 돈쓰러 왔지 돈벌러 왔나, 하고는

돈 지랄 하는 셈 치고 세 번이나 사 먹었네요.

 

 

한국에서의 5주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 와서,

엄살 좀 실컷 피워 보자! 하고

 

이모가 그러시는데, 나 산후 조리 하는 것처럼 해야 한대거든?

밥도 누가 해주고 집안 일도 하면 안되고, 알지?

당신이 나 한달 동안 아주 아주 잘해줘야 해.

 

했더니, 남편 되시는 분께서 점심 먹으라며

해맑게 웃으며 자랑스레 내민 것이

바로 도나쓰!

미세스 린다 라는 브랜드인데 1불 69전에 6개 들었는데 아주 먹을만 하다나요.

이 사람이 남편인가…남인가…

그래서 제가 쌩하게 이런 ‘도나쓰 따위’는 안 먹는다고

당신이나 실컷 먹고 헤라클래스 되라고 소리 지르고 획 돌아 앉았더랬는데

지금 내 손으로 이렇게 자발적으로 사먹게 될 줄이야..

신랑한테 말하지 말아야지.

 

 

새벽 다섯 시면 벌써 어슴프레 동이 튼다는 거,

다섯 시 반이면 이미 환~해 진다는 거, 처음 알았네요.

한 여름엔 나무들도 더워 보이는데 아직 6월이라 그런지 나무도 싱그럽고,

동 틀 때 일어나서 해 질 때 잠이 드는,

모든 활동은 그 해가 머리 위에 떠 있을 때 하는

그런 자연섭리 친화적인 스케줄로 며칠 살아보니, 이것 참 좋네요.

회복기의 환자가 하기에는 아주 딱 좋은 스케줄 같아요.

 

 

걸음 속도에 따라 20분에서 30분 걸리는 공원에 도착해서

흐르는 강물 바라 보면서 벤치에 자리 잡고

씨디 플레이어에 씨디 바꿔서 다시 걸고

이어폰 끼고 느긋하게 앉아서

도나쓰 꺼내서 커피에 담가 먹는데

그 이른 시간에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더군요.

 

 

남들은 운동복 입고 이리 저리 뛰어 가는데

나 혼자 새벽에 평상복 차림으로 벤치에 앉아 주섬 주점 도나쓰 먹고 있자니

분위기가 영

비행 가출 아짐스러운 것이…

 

 

내일부턴 나도 옷이라도 운동복으로 입고 와야겠다.

가만, 저 손에 들고 뛰는게 엠피 뜨린가 보지?

다들 저걸 들었네?

저건 들고 뛰어도 음악이 안 튀나?

씨디 플레이어는 헛발질만 살짝해도 튀는구만.

허나,

세상 사람 아흔 아홉명이 엠피 뜨리를 들었다 한들

오로지 나 한 명만이 구세대 씨디 플레이어를 취급한다 한들

나는 기죽지 않아.

암. 그렇고 말고.

나는 남들 눈치나 보고 사는 인생 따위는 살지 않겠어.

이거 앞으로 십 년은 더 멀쩡하겠는데 뭐.

 

 

라고 생각은 저리 했고만

어째서 손은 씨디 플레이어를 잽싸게 가방 안에 밀어 넣었는지…왜지??

이해가 안 가네…

남들 보면 챙피할까봐 쌓인 먼지는 잘 닦아 가지고 나왔구만.

디카 처음 사서 들고 나올 때

안절부절 액정에 흠집 날까봐 케이스 없이 이런걸 판다고 궁시렁 대다

궁여지책으로 양말짝에 넣어 와서는 누가 볼까봐 조심 조심 꺼내면서

남들이 볼까 전전긍긍하는 내 자신이 실망스러워 화를 낸 기억이 새삼스러운데,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벙어리 장갑에 넣고 다니면서

당당하게 꺼내 들었는데

이번엔 포터블 씨디 플레이어로 사람 이렇게 추레해 지나..

에효….엠피 뜨리는 얼마나 할래나.

산다고 내가 사용 방법이나 제대로 알고 쓸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일단 도나쓰나 먹자. 하고

도나쓰 두 개째 꺼냈더니

이번엔 옆에서 이상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돌아 보니

웬 다람쥐 한 마리가 아주나 강렬한 시선으로 저를 빤히.

 

 

흥!!! 왜 추접스럽게 남 먹는걸 쳐다 본대?

저걸 겁을 줘?

어떻게 겁을 줘서 쫒아 버리지?

 

 

하는데,

손은 덜덜 떨고 있냐고요..

예전에 노 여사가 해주셨던 ‘무서운 다람쥐들’ 이야기가 생각나서 겁이 난 것 일까?

 

 

노 여사 아는 아주머니가

산에 도토리 줏으러 가서

한참 줍고 있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정면에 서서 아줌마를 노려 보더래요.
(왜 내 먹이를 빼앗느냐…이런 거겠죠)

그러더니 어디론가 휙~ 가는가 싶더니

금새 돌아 왔는데, 이번엔 열댓 마리가.

그 아줌마를 에워 싸고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노려 보더랍니다.

그래서 그 아줌마가 무서워서 아주 혼 났다고.

다람쥐가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고.

 

 

그래서 도토리 도로 내 놓고 왔는지,

아니면 후다닥 줄행랑을 쳤는지,

그러다 다람쥐 떼들의 공격을 받았는지는 결말이 불분명한데,

노 여사한테 여쭤봐야 겠습니다.

 

 

등 돌리고 자세 고쳐 앉아서

옆 눈으로는 간간이 다람쥐 째려 주면서

마저 도나쓰를 먹는데,

저게 말이 내가 째려 본거지 실은 눈치 본거네요.

쟤가 뺏어 먹겠다고 갑자기 나한테 달려 들면 어떡하나, 겁이 나서

도나쓰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커피 컵으로 조준이 잘 안되는 것이.

인생 이 만큼 쓴 맛 단 맛 볼만큼 보고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도나쓰 하나도 맘 편히 못 먹고 다람쥐 눈치나 보고 있다니…

 

 

한참을 앉아서 음악 듣다가

다시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찌개 데워서 밥 먹고

흑염소 데워서 맛나게 먹고

거실에 늘어 놓았던 짐들 마저 다 정리하고

배 좀 가라 앉았다 싶어서 샤워 하려고 시계를 보니

흐미나…아직 열 시 밖에 안됬다!

 

 

공원 간 첫 날은

제주도 여행 갔을 때 약천사 라는 절 매점에서 사온

‘회심곡’ 이랑 ‘부모 은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고

 

 

둘째 날은

클래식 음악을 전혀 모르는 무지랭이 답게 십 몇 년쯤 전에

레코드 가게에서 그냥 막 집어 들어 사와서는 한 번도 제대로 들은 일이 없는

‘영화 속의 클래식’

걸었더니 처음 나오는 음악이,

어? 장학 퀴즈 음악이네?

그 다음 거는 보도본부 24시 음악이던가?

그 옛날 그 프로들이 음악 하나도 그저 근본없이 틀어댄게 아니었구나.

저 음악들이 무슨 영화에 나왔다는 거며

왜 내가 영화 볼 적에 좋다고 생각했던 그런 음악들은 없는 건지?

그래도 참을 성 있게 끝까지 듣기는 다 들었어요.

이건 다시 가져오지 말아야지.

 

 

셋째 날은

좀 발랄한거 듣자고

인어 공주랑 라이언 킹 싸운드 트랙.

 

 

오늘은 김수희 골든 베스트

서울 여자

멍에

고독한 여인

남행 열차

잃어버린 정

못잊겠어요

.

.

.

하나같이 주옥 같은 명곡들.

저건 역시 십오년쯤 전에 아틀란틱 씨티로 공연 왔다 길래

둘째 언니가 시집 가기도 전이었으니

한 십 오년 보다 쪼금 더 전인가 봅니다.

둘째 언니, 셋째 성, 나 이렇게 주루룩 출동해서

멋진 공연 보고 나오는 길에 내 금쪽 같은 용돈으로 사온 씨디예요.

 

 

저걸 사온 날부터

아침이면 학교 갈 준비하면서 내 오디오에 걸어 놓고

둘째 언니, 셋째 성하고 셋이 방바닥에 앉아서 노래 따라 부르면서

얼굴에 찍어 바르고 있으면

노 여사가 후다닥 방문을 걷어 차고 들어 오셔서는 질색 팔색, 노발 대발 하셨댔거던요.

 

 

아니 왜 어린애들이 술집 여자들처럼

아침부터 화장하면서 이런 노래를 따라 부르냐!!!!!!

 

 

어머니.

이건 예술이라고요.

스물 두 살, 네 살, 일곱 살 먹은 딸 셋이 하루 일과 준비하면서

사이좋게 노래 부르는게 보기 좋지 뭐가 어떻다고 그러세요.

어머니 좋아하시는 박일남 보다 우리 감성엔 김수희가 더 낫다고요.

우리가 공통으로 좋아하는 나훈아만 매일 들을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는 분위기 자체가 청순이 안되는 사람인데 어쩌라고요.

내가 귀신 머리하고 재채기 할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노노노’나 ‘보랏빛 향기’ 따위를 부르는게 더 안 어울리지.

 

 

언뜻 신 새벽에 김수희는 참으로 언밸러스 할 거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이스트 리버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흐름이

반주에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끈적한 색소폰 소리 만큼,

딱 고 만큼 끈적거리더군요.

 

 

그렇다고 강물 박자가 유독 김수희 노래에만 잘 맞더라, 하면 그것도 아니예요.

인어 공주는 인어 공주 대로

회심곡은 회심곡 대로

너무 잘 어울리지도 너무 안 어울리지도 않는

딱 그 만큼만 대충 잘 어울렸던 거 같아요

마지막 노래,

‘당신은 누구세요’

까지 다 듣고 자리에서 일어 났습니다.

 

 

 

그래 딱 이 만큼만 살자.

 

 

 

여기에 내가 있고 여기에 세상이 있고

딱 이 만큼만 같이 끈적이면서 살면 되는 거야.

 

 

 

 

 

늙으신네나 젊은네나, 늙으신네는 먼저가고 젊은 청춘 나중갈제,

공명천지도 하느님 아래 흘러가는 물이라도 선후 나중은 있겠구료.

수미산천 만장봉에 청산녹수가 나리는듯이

차례야 차례로만 흘러 시왕극락을 나립소사 나무아미로다.

인간세상에 나온 사람 빈손 빈몸으로 나와 물욕탐심 내지마오.

물욕탐심은 기불탐이요 백년탐물은 일조진이다.

삼일수임은 천재보요 만단천량을 모아다 놓고,

먹고가며 쓰고나 가소

못다먹고, 못다쓰고, 두손모아 배위에 얹고 시름없이 가는 인생,

한심하고도 가련하구료.

인간칠십은 고래희요, 팔십장년 구십춘광 장차 백세를 다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에,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사십을 못사는 인생,

한번아차 죽어지면 싹이나느냐 움이날까, 이내 일신망극하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진다고 설워마라,

동삼석달 죽었다가 명년삼월 봄이오면, 너는 다시 피련만은

우리 인생 한번가면, 어느 시절 다시오나,

세상만사 헤아리면 묘창해지일속이라 단불의 나비로다 뿌리없는 부평초라

하루살이 같은 우리 인생 천년살며 만년사오,

천만년을 못사는 인생, 몽중같은 살림살이, 태평하게 사옵소서.

 

 

                                                    회심곡 중에서

 

 

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살다 똥 밟은 적은 있어도,

그리고 미친 개한테 뒷 다리 물린 적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이보리색 정장을 입고 나선 출근길에서

비둘기들의 집단 방사를 옴팡 뒤집어 쓴 일까지도 있긴 했지만

내 인생 아직 똥 밭에서 구른 적은 아직은 없는 것 같아요.

 

 

하물며

초 여름 날,

나무 그늘 아래서 마시는 새벽 공기는

비록 전 날의 방문객들이 싸질러 놓은 쓰레기가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공원이긴 해도

(음식 마구 버리는 사람은 지옥가서 아귀로 환생 한다는데

저렇게 마구잡이로 쓰레기 버리고 집 쓰레기 봉투까지 공원에다 버리는 사람들은

뭘로 환생 하려나 심히 궁금함)

똥 밭 보다는 훨씬 훨씬 훨씬 더 쾌적합니다.

 

 

한 고비 넘기고 추스리는 중이라

백지처럼 아무 생각이 없지도 않고, 더 마무리 지을 마음도 아직은 남아 있지만

똥밭에서 구르는 거에 비하면

이건 오성급 호텔에서 베케이션 중이라고 생각 하렵니다.

 

 

한국 방문 중에 접선했던

천기누설 하시는 어떤 도사님 집의 거실에 붙어 있던 말인데

(3만원 주고 인생 상담 받고 왔습니다. 사주 팔자라고나 할까요)

뜻은 잘 몰라도 웬지 멋지게 느껴져서 대충 외워 봤어요.

 

 

한 가지 움직이지 않음이

만 가지 움직임을 제어 할 수 있다.

 

 

마음이 이리 저리 강단없이 흐르려고 할 때 한 번 그 마음을 잡아 봐야 겠어요.

마음이 두서없이 흐르느라

내 일상이 다 흐트려져 버리지 않게.

그래서 그 마음에 다 짓눌려서 또 다시 주저 앉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하지 않게.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리고 싶은데, 그래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데

혼자 여행 갈 형편이 안되잖아? 할 게 아니라,

(떠나서 잡아질 마음이라면 가만히 앉아서도 잡아진다는 군요)

내 집 안방에 앉아서

그렇게 잡아 봐야 겠어요.

 

 

내일부터는 그냥 강물 구경하면서 앉아만 있지 말고

타월 한 장 가져가서 트랙 안에 스트래칭 하라고 만들어 놓은 자리 앉아서

요가도 살살 해야겠어요.

거긴 다람쥐는 없음.

요가 메트가 있긴 한데

메고 다니는 그물망 같은거? 그게 없네요.

메트 손에 들고 가느니 그냥 타월 한 장 배낭에 넣고 가는게 간편하겠어요.

그런데 타월도 시퍼런 바탕에 돌고래가 코구멍으로 물 내뿜는 그림 그려진

그런 싸구리 유치한 비치 타월 밖에 없는데 새벽부터 너무 튈라나???

좀 튀면 어때. 남 눈치 따위는 안 보기로 했잖아!

공공 장소에서 비키니 입고 요가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겨우 타월인데 뭐.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