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참, 나를 그렇게 모르시나......
내가 설마 생일 선물로 주신 금일봉을 생활비로 쓸까봐 그러시나 ㅋㅋㅋ

드디어 생일 당일인 토요일 아침,
생일 축하 전화 때린 사람들과 안때린 사람들 명단 정리 끝내고
멀리서 온 시누들하고 신랑이랑 올 시즌 처음으로 야구장 가서
재밌게 놀다 왔다.
시누들 앞에서 신랑이 도대체 서른다섯이나 된 여자가
이렇게 십년씩이나 어려보여도 되는 거냐고
한바탕 주책을 떨고
시누들도 같이 주책맞게 동의해 주고 해서리,
그들의 진심 여부를 떠나
그냥 나는 여전히 나만의 왕국에 여왕된 기분을 제대로
만끽한 하루였다

게임 중간에 관중석으로 쏘아 올려주는 공짜 펩시 티셔츠 하나 받겠다고
자리에서 뛰쳐 나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어도 못 건졌다.
실망해서 안그래도 심술맞은 인상에 볼을 씰룩씰룩 댔더니
그런 내 모습이 귀엽다고 볼을 꼬집어 뜯으며 뽀뽀 세례를 퍼붓는 신랑의 위로가 있어서
참 내가 모지란 사람하고 결혼하길 잘했단 생각도 한 번 더 했고.

더블 헤더 두 게임을 다 땡기고 집에 오니
피곤해서 외식할 생각도 나질 않아서
일단, 생일 축하 전화 안한 사람들한테 일일이 전화 걸어서
옐로우 카드 한장씩 날리고,
맥주나 더 사다가 신랑이랑 놀았다.

전 날 신랑이 생일 선물로 사온 산타나 1969년 앨범을 걸어놓고
생일 선물 타박을 시작했다.

맨날 뭐 받고 싶냐고 물어만 보고는 내가 달라는건 해주지도 않고, 췟!
이게 뭐냐고!!!!!!!!!

미안해 자기야, 그런데 하늘에서 달을 따오는건
나한테는 불가능한 일이잖아......

내가 나사에 전화라도 넣어보라고 했잖아!
전화 안했지???

벌써 몇년 전부터 생일 선물로 저 하늘의 달을 따다 달라했건만.....
get me the moon.......please......I want the moon.........
무능한 나의 남편이여.........

그러나,
산타나의 기타 소리가 너무 좋다.
이쯤에서 참자.

자기 오늘 야구장에서 맥주값 한 십만원쯤 썼지?

응....

그래, 내가 이것도 그냥 봐준다.
마누라 생일에 혼자 신났어. 원없이 마시는고만...
그래도 내가 갖고 싶었던 씨디라도 사와서 봐주는거다.

재밌는건, 신랑이 사온 씨디 두 장 값이
(완존 헐값 쎄일하는거 잘도 찾아 샀다!)
내가 열일곱살 때 생전 처음으로 받은 생일 선물과 값이 동일한 거다.
그 때에 비해 인생이 많이 업그레이드 됬다고 혼자 흐뭇해 하고 있었는데
참 재밌네.

전 해에 엄마가 돈 번다고 혼자 뉴욕으로 오시고,
내가 고1이던 그 해는 큰언니도 시집가기 전이라
자매 넷이 단칸방에서 정말 사이 극악하게 나쁘게 살던 시절이었다.

엄마가 미국엘 오시고 얼마간의 생활비가 부쳐지고
직장인이던 큰언니 둘째 언니가 월급받는 날이면
그렇게 한달에 한번 길음시장에 있는
돼지갈비 집에서 네 자매가 외식을 했더랬다.
가족 단위 외식이란 걸 그 때 처음 하기 시작했는데
6월 말, 돼지갈비 뜯고 있는데 큰언니랑 둘째 언니가
나랑 역시 같은 7월에 생일이 있는 셋째 언니더러
생일 선물 뭐 받고 싶냐고 물어봤다.

켁! 생일 선물?????????

선물이라고는 추석 때 날잡아서 옷이나 한벌 얻어 입을까,
원래 우리 집이 선물의 개념 자체가 없는 집인데....
뭐 월말 고사 잘 봤다고,
1등 했다고 선물로 뭘 사준다 어쩐다 하는 얘기는
많이 들어는 봤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중산층 남의 집 애들 얘기고,
나? 생일 선물을 사준다고라???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맛을 안다고
생전 생일 선물을 받아 봤어야 뭘 사달라고 말이 나올텐데
정신이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 다음부터 고기가 어떻게 넘어갔는지도 모르겠고
머리속엔 선물 생각만....
고민만 하다가 밥 다 먹고 집에 왔다.
그 때 언니들은 나름대로
나랑 셋째 언니한테 손목시계를 하나씩 해주면 어떨까 하고
얘기가 되있던 상태였지만 그래도 우리가 뭘 받고 싶은지
직접 선택의 기회를 주기 위해 물어본 거란다.

그 때 유행하던 운동화 한켤레, 옷 한벌, 뭐 이런거 말했다간
이게 선물 사준다고 했더니 분수를 모르고 까부네.
이럴까봐 머리 속에서 이내 지우고,
정말 도대체 뭘 사달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이런 일생에 처음 맞은 기회를 날리기도 그렇고,
옆에 셋째 언니는 선물 필요없어....이렇게 의연하게 나왔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미친짓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의 신조는
선물은 거절하지 말자! 이다.
주는 사람이 줄 만하니까 주는 것이므로
줄 때는 다 받아야 한다. 낼름 덥썩 기쁜 마음으로.......

그리하여

온통 정신이 혼미해 질 정도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뭔가는 건져야 하고, 너무 과하게는 부르면 안되겠고 하여
드디어 결심을 했다.

큰언니랑 둘째 언니를 똑바로 쳐다보며
내가 원하는 생일 선물을 말했다.

나 수박 사줘.

언니들이 황당하다는 듯이 서로 쳐다본다.
몇 초 후에 큰언니가 말한다.

수박 먹고싶어? 수박도 사줄께. 그거 말고 선물...

나, 다시 혼란스럽다.
수박도 사줄테니 선물을 말하라고?
나 더 이상 생각할 힘도 없다.

근데....나 수박 실컷한 번 먹어보고 싶어.
혼자 한 통 다 먹어보고 싶어.

그 날 저녁, 수박 사왔던 걸로 기억한다.
언니들이 박수치며 지켜보는 앞에서 한통은 다 못먹고
반통 앉은자리에서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음 날 손목 시계도 생겼다.
언니들이 그러는데 만이천원 줬다고 한다.
그 시계도 참 예뻤고,
수박도 정말 맛있었고,
그 때는 언니들도 정말 좋았다.
지금보다는 사이가 덜 나빴고.
(우리집 자매들은 맨날 싸운다)

신랑하고 연애 시작했던 초기에 이 수박 얘기 해줬더니
신랑이 너무 좋아했었다.
아름다운 얘기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기 식구들한테 얘기 해줘도 되겠냐고 묻길래 맘대로 하라고 했더니,

신랑 부모님 처음 뵙던 날이 내 생일 며칠 전이었는데
생일 케잌이랑 수박 한 통 사다 놓으시고
나보고 수박 많이 먹으라신다.....그거 다 먹으라고,
미국 수박은 엄청 큰데....
밥도 엄청 먹고 난 후라
내가 두쪽 먹고 그만두니 굉장히 의아해 하시던 얼굴이......

나이 서른 다섯에
수박은 돈 생각 안하고 먹고 싶을 때마다 실컷 사다 먹는다.

업그레이드가 별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