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 목요일

 

전 날 워낙 빡센 스케줄을 소화한 탓에

오늘은 설렁설렁 가기로 했다.

오늘마저 박물관이니 미술관이니 갔다간 세 명 다 병나 쓰러질게 뻔했으므로.

 

일단 전 날 밤 먹은 라면으로 부대낀 속을 달래는게 급선무 였던 지라

아침으로 고추장 찌개를 끓이기로 하고

혼자 수퍼를 향해 나서다.

 

사촌 언니, 두부 못 넣는 대신 버섯이라도 넣자고,

버섯 보이거들랑 좀 사오라고 한다.

감자, 호박, 양파, 버섯을 넣고 고추장 찌개 끓이고

옆에서 곁다리로 감자 조림도 했다.

 

아침 상 차려지니 먹기도 전에 마음이 뿌듯하다.

역시 한식 밥상은 여럿이 둘러 앉아 부산스럽게 먹어야 제 맛이다.

셋째 성이 언젠가 한 말이 있다.

‘시장이 반찬이 아니고 사람이 반찬’이라고.

평소에 혼자 밥 먹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집에 함께 밥 먹을 남편이라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남편 일할 때

함께 저녁 먹은 일이 일년에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항상 바쁘고, 항상 늦고, 그래서 저녁도 항상 따로 먹었어야 했다.

 

10개월 째 백수인 남편,

올해는 나에게 함께 밥먹는 즐거움을 선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고마워 해야지.

별로 고맙단 생각은 사실 그닥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마워 하련다. 억,지,로! 라도.

 

이번 여행에 난 셋이 맨날 함께 먹을 밥이 제일 기대됬다.

밥 같이 먹고, 밥 먹으면서 얘기하고.

음식 간이 맞았는지, 맛이 없는지, 내일은 뭘 해 먹을지 얘기도 하고.

옛날에 함께 자랄 때 먹었던 얘기도 하고,

명절에 먹었던 음식 얘기도 하고.

다른 식구들 입맛 얘기도 하고.

 

셋이 둘러 앉아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꼬박 아침 밥 먹자니, 살까지 올랐다.

나 이런 생활 너무 즐겁다고 하며 새로 한 뜨신 밥에 왕창 먹다.

여행 전, 한참을

식욕 부진과 체력 저하로 컨디션이 바닥을 긁다 갔는데

아침 잘 챙겨 먹으니, 하루가 기분 좋게 시작 된다.

 

아침 먹고, 대학 캠퍼스 구경을 좋아하는 이쁜아짐.

소르본 대학 구경가자고 제안.

집에서 도보로 10분도 채 안 걸린다.

갔더만…

방문객 출입 금지.

정문에서 일일이 신분증 검사한다. 너무 아쉽다…

나 사고 안치고 얌전히 구경만 하고 나올 자신 있는데…

세상은 왜 날 못 믿는거야.

그래도 학교에서는 교장 다음 서열이 수위라고, 수위 아저씨 넘 무서워 보인다.

뚫고 들어갈 엄두는 못내고

아쉬운 마음에 사진만 몇 장 박고 발길을 돌리다…

 

봉 마르세라는 백화점의 식품 코너가 구경할만 하다고 사촌언니 제안.

버스타고 백화점 도착해서 정문 통해 들어 갔더만

바로 보이는 남자 양말 섹션.

한 켤레 45유로.

 

한 켤레에 45유로 하는 양말이 빵꾸나면 얼마나 속상할까. 했더니

사촌 언니가

새로 45유로 짜리 양말 한 켤레 사면 되지,

양말 한 켤레에 45유로 짜리 사 신는 사람들이 빵꾸났다고 속상해 하겠냐고

그런 사람들의 세계를 우리 수준으로 이해하지 말라고 충고.

 

윗층으로 올라가 숙녀복 구경.

버버리 매장이 나온다.

클래식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 흐미…예쁘다…885유로.

입어 볼까? 하다. 관둔다.

입어 보면 분명히 마음에 들테고, 마음에 들면..

나라는 인간은 카드로 지를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으므로.

내가 이 상황에 그러면 안되지. 암만…

나에게 아직,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 거다.

 

클로에? 라는 매장이 나온다. 들어는 봤다. 가방이 인기라던가?

가격표는 안 봤지만, 마네킹이 입고 있는 미니 드레스가 너무 너무 예쁘다.

셋째 성한테 사달라고 조르다.

 

언니 있잖아. 만약에 어떤 백만장자가 언니한테 청혼하면 꼭 결혼해 줘.

그래서 나 저거 사 줘.

 

셋째 성, 흔쾌히 그러마고 약속. 아 신난다~~!!!

 

비싼 옷, 비싼 신발들 대충 구경하고

원래의 목적지였던 식품 코너로 갔다.

 

흐미나…너무 좋다.

나는 원래 맨날 가는 동네 수퍼 마켓에서도

식재료 구경으로 한 시간 너끈히 때우는 사람이다.

이것이 나의 진정한 구경 거리다!

 

치즈 섹션을 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종류가 하도 많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다 아는거 하나 나왔다. 체다 치즈. 무지하게 반갑다.

 

치즈 섹션에서 눈을 돌려 옆을 보니, 프레쉬 파스타가 보인다.

번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

성님들한테 링귀니를 사다 저녁으로 칼국수를 끓여 먹으면 어떻겠냐고 제안.

성님들,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나…하는 표정으로.

 

우리야 모르지. 어차피 니가 할거니까 니가 알아서 해.

 

링귀니 한 봉지 장바구니에 담고 양념장에 쓸 요량으로 차이브 한 단 집고.

저녁 거리 해결했더니, 피곤이 엄습한다.

구경할게 이렇게 많은데…힘이 없다.

몸에선 기력이 엥꼬 났으니 밧데리 충전하라 성화다.

점심으로 6유로 50 씩이나 주고 사먹은

비싸긴 드럽게 비싸나 내용은 부실했던 파니니 샌드위치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음이다.

 

성님들한테 가방 나한테 던져주고 구경 더 하라고 하고

나는 장바구니 앞에 끼고 기둥에 기대어 바닥에 철퍼덕 주저 앉는다.

가방에서 비상 식량으로 들고 다니던 바나나 꺼내서 먹다.

 

선물로 사갈 초콜렛 구경하느라 성님들 여념이 없고

초콜렛 구경 끝난 다음에는 각자 여기 저기 헤비집고 구경 다닌다.

내가 자리 잡고 앉은 바로 옆에

올리브 오일 섹션이 보인다.

 

아..구경하고 싶은데..한 병 사가고 싶은데..

발사믹 식초도 한 병 사가고 싶은데..

마음은 그러나, 힘이 한 개도 없다. 지금은 그냥 쉬어야 한다.

계속 앉아 있기로 한다.

뉴욕에 기름이 없어 식초가 없어. 과한 욕심 부리지 말고 쉬어!

 

구경 어지간히 다 했는지, 성님들 와서 계산하자고 한다.

 

계산하고 나와서 버스 정류장 걸어가는 길.

두 성님들도 맛이 갔다.

우리 셋은 대체 왜 이 모양일까…다시 한 번 괴롭다.

 

버스 안에서,

집에 가서 먹을 칼국수를 생각하며 힘 내라고 성님들 독려하고

집에 도착.

두 성님들 뻗어 버리다.

 

나는 집에 오자 마자 바로 냄비에 물 올리니

성님들, 너도 좀 쉬었다 하라고 한다.

 

백화점에서 좀 쉬어서 그런지, 집에 와서 밥 해 먹을 생각하니

나는 힘이 다시금 불끈! 솟는다.

 

멸치로 육수 냈다.

대단하다. 해외 여행와서 멸치 육수까지 내서 칼국수 끓인다.

멸치는 집주인 아가씨 껀데 다섯 마리 훔쳤다.

나중에 고백해야지.

 

차이브 다져서, 다진 마늘, 고추가루, 깨소금, 참기름 넣고 간장 양념장 만들고

드디어 링귀니 투입.

국수를 조금 덜 넣었어야 했는데,

욕심 사납게 한 봉다리 다 때려 넣었더니 국물이 상대적으로 좀 부족하다.

그래도 맛은 먹을만하다. 성공이다. 음하하!!!

 

양념장 얹어 먹으라고 국물 간 심심하게 했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고, 김치해서 링귀니 칼국수 먹다.

사촌언니가 국물 맛있다고 연신 먹는데, 국물이 조금 부족 했던거 외에는

그런대로 만족.

셋 다 배 부르게 먹었다. 보람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