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디어 이렇게 연말이 왔군요.

 

밀린 빨래해서 깨끗한 속옷넣고 짐 꾸려서 화요일쯤 시댁으로 가려고요.

부부 백수의 현실에서 이렇게 아무 진전없는 상태로

어른들 뵈러 가는거 좀 내키지가 않아서 실은 잔머리 살짝 굴리다가,

핑계를 대자면 없는 것도 아니예요.

아예 둘 다 안가거나 아니면 남편만 보내고 저만 빠지는 이런 방법도 있고 한데

마음 고쳐 먹고 가기로.

 

올해, 저 수술 건만으로도 집안의 큰 사건이었는데

얼마 전에 시아버님 응급실도 한 번 다녀 오셨다 하고,

멀리 하와이사는 큰 시누도 병이 하나 생겨서 아프기 시작했어요.

막내 시누 역시 멀리 하와이 큰 언니 곁에 있어서

뉴욕엔 지금 저희랑 둘째 시누 내외 뿐이라.

시어머님이 정신적으로 참 힘드시겠다, 싶어서,

에라 모르겠다, 찌질하게 살아도 자식은 자식이니, 명절 때 얼굴은 보여 드려야지,

해가지고요.

 

팔자 좋게 파리로 놀러까지 갔다 와서, 바로 부부 싸움 대판 벌리고는,

한 달 내내 제가 기분이 엉망이었거든요.

아들 집에 전화를 해도 어쩌다 아들하고 겨우 통화되,

며느리는 받지도 않아..

어른들 걱정이 그간 많으셨었겠죠.

 

제가 마침내 남편하고 정상 관계를 회복한 이달 초에 전화를 받으니,

아버님이 거진 울라고 하시네.

 

얘…가끔씩 어떻게 잘 지내는지 목소리 듣고 싶구나.

통화 오래 안되면 걱정이 되서.

 

아버님 치통은 좀 나아지셨어요?

심장은 괜찮으시고요. 다리는 좀 어떠세요.

 

하고 안부 여쭙는 끝에,

땡스기빙 때 뵈요 아버님.

 

했더니, 갑자기 막 생기가 도는 목소리로

 

오…그래? 올거냐? 정말로 올거냐?

아들이 너랑 상의해 보고 알려 준다고 했어서 그 대답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 끊고 나니 남편 얼굴에도 안도감이.

 

아유…집에 간다고 하셨어요?

정말로 저랑 같이 가실거예요?

아유…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래…

 

내가 정말로…

이 결혼을 유지하는 10%는 당신에 대한 이 빌어먹을 사랑이고

그래도 사위라고 당신 귀여워 하시는 노 여사 때문이 10%에다

나머지 80%가 내 맘 편하게 해주시는 당신 부모님 때문인거나 알아둬라!!!

 

지난 달 내가 내지른 화풀이가

끝도 없이 가라앉는 남편에겐 어느 정도 충격 요법의 효과가 있었어서

부부 싸움과 그 이후로 했던 제 마음 고생이 아주 무의미하진 않았어요.

 

저 역시 일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제대로 부지런히 안 움직이고 있다

몸이 아파 수술받고 어쩌고 한지라,

남편한테 말하길, 미안한데 지금은 내가 당신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잖아.

나를 책임져 줘.

 

라고 말하기 까지 내 안의 자존심이 몇 달간 악을 쓰고 있었죠.

그리고,

내가 이런 고민 할 필요없이 딱딱 힘차게 다시 제 발로 서지 않고 있는

남편한테 약이 오를대로 오른거죠.

본질은 나도 돈 안 벌어 온다고 남편 구박만 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안하는, 그런 여자 였던 거예요.

저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끔 현실을 남편이 만들었다는 데에

내 부끄러움과 울화를 터뜨린 거죠.

 

그 부끄러움을 포장한 상태로 화를 낸거죠.

집에서 놀만큼 놀았으니 돈 좀 벌어 와, 하는 것이 제 울화의 포인트가 아니다,

로 시작해서

 

돈을 벌거나 안 벌거나,

직장이 있거나 없거나,

제발…오전 중에는 일어나고

일어나서는 그간 일에 올인하느라 가질 수 없었던 지금의 체력, 더하기 시간을

나랑 산책도 좀 하고, 나랑 장도 같이 보러가고,

우리가 좀 더 재미나게 사는 쪽으로 써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폐인 생활로 점철할 바에야,

일년을 놀면 뭐하고 2년을 놀면 뭐하겠느냐.

한 달을 놀아도 노는 것 답게 놀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저 지켜보며 용기 북돋워주고 함께 나누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아홉달이 지나도 달라진게 없으니

아마 이것은 당신만이 짊어질 수 있는 고통인가 보다.

그럼 내 할 일은 더 이상 없으니, 나는 이제 당신의 카운셀러, 연인, 베스트 프렌드,

이 모든 역할에서 잠시 물러나 있겠다.

나 혼자 시간 좀 보내련다.

 

하고 집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엄포를 놓았더니만…

 

눈물과 콧물 섞인 한바탕 자아비판의 드라마가 이어지고,

다음 다음 날,

제가 정성껏 다려준 와이셔츠 입고, 양복 차려 입고, 문제의 전 고용주를 만나고

드디어, 자기 개인 사물도 찾아 왔어요.

 

제가 다시 시작하려면, 출발점은 거기라고 소리 소리 질렀거든요.

 

당신 물건 찾아와.

해고는 해고고, 개인 물건 못 찾아가게 하고,

부쳐준다 부쳐준다 말만하고 9개월인게 말이 돼?

다음 직장 알아보는건, 이것부터 해결한 다음 순서야. 그렇다고 생각안해???

 

남편 물건을 챙겨서 회사 앞 술집으로 나온 사장의 아들은

일단 정중한 태도로 나왔다 하네요.

술도 사주면서, 회사 측 입장 설명하고, 남편한테 이해를 구하고,

저야 아직도 그 사람들을 욕하고 있지만

남편 입장에서는 저게 큰 치유의 계기가 됬어요.

 

사장 아들 말이, 남편이 7년여를 일하는 동안,

주어진 3주 휴가를 다 쓰지 않은 회사 역사 이래 최초이자 유일한 직원이었으며,

얼마나 보탬이 되는 직원이었는지,

회사 사정 상 더 이상은 연봉을 올려 줄 수도,

그 연봉을 유지해 줄 수도 없었다는 입장

(한마디로 자기들 배 불리는데 지장있다, 이 소리면서)

그런 식으로 해고 통보를 한 건, 자기들 잘못이었다, 이해해 달라,

그 때 회사 사정이 너무 안 좋았다.

 

뭐 내용상은 하나같이 다 개소리지만,

어쨌든 저 얘기를 풀어가는 형식, 방법 상으로 저 날의 만남이 남편한테는

자존감 회복에 큰 도움이 됬으니,

저도 이제 마음의 원수들 한 무리를 용서하려 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그 날 이후로 저랑 함께 앉아서 새 이력서도 작성했고요,

요즈음은 에이젼시 슬렁슬렁 돌아다니고 있어요.

연말이야 어차피 경기가 좋은 시절에도 구인 시장은 동결인데

작금의 상황에야 오죽 하겠어요.

올해는 그냥 이렇게 간다, 마음의 준비는 저는 하고 있어요.

 

꼭 남편이 취직을 해야 한다는 것 보다,

어쨌든 올 해 한 해는 이렇게 쭉 갈 수 밖에 없다로,

빚은 지면, 또 열심히 일해서 갚을 날이 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남편의 움직이는 모습에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아침엔,

요즘은 저보다 일찍 일어나서

과거처럼 본인이 열심히 하던 이상한 미용체조 비스무리한 자기만의 운동도 다시 하고요,

커피 뽑아 놓고 저 깨우고요.

그 날 계획도 말해 주고요.

 

일주일에 두어번 시내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이력서도 돌리고 그러고 있네요.

 

제가,

연말까지 크게 기대는 하지 말자고,

그래도 이렇게 나서줘서 정말 고맙다고.

 

그렇게 말해 줬더니, 본인도 크게 스트레스 받는 눈치는 아니예요.

 

생계를 위해 밖에 나가 일을 한다는 건,

내가 그렇듯이,

남편도 두렵고 힘들긴 마찬가지니까.

거기에 보너스로 더해진 ‘남자’로써의 부담.

여자는 잘하면 멋진 커리어 우먼이고,

남자는 잘해야 본전, 못하면 찌질이.

라는 세상의 성 역할 인식의 희생양 이기도 하니까.

 

죽어도 나 손해보는 일은 안 한다고 악악대는 부인은

이런 쪽으로는 또 하염없이 남편을 바라보고 앉아서

나의 백마탄 왕자가 되어 주세요, 라고 마음 한 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남편을 앙큼하게 바라보고 있고.

난 지금 건강이 온전치가 않잖아. 이럴 때는 남편이 배우자를 먹여 살리는게 당연하지.

 

라고 자신을 비겁하게 위로하면서.

 

남편 입장에서야 사실,

아픈 여자 데리고 살 필요도 없는데 말이죠.

버는 월급 혼자 쓰면 더 재밌게 잘 살 수도 있고요.

 

남편한테 물었어요.

 

당신, 나 사랑하는거 힘들지 않아?

 

아니요. 전혀 안 힘든데요. 저 변태예요. 매조키스트요.

 

그러더니 덧 붙이는 말,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절망을 해요.

내가 당신을 슬프게 했다는 사실땜에 내 자신이 너무 싫어요.

당신이 웃는 모습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난 살아요.

 

음…

저건,

드라마 대사로 쓰기에도 너무 일차원적으로 진부한 표현인데…

듣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흐뭇하긴 하네요.

분위기 좋군요. 이 분위기를 이어 가고자,

 

생명보험 좀 하나 들지?

결혼 전에는 빵빵한거 하나 들어 준다더니…어떻게 된거야…

당신 죽어도 나 굶어 죽지는 않겠다, 생각하면 당신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

 

했더니,

저 말이 재밌다고 좋아 죽습디다.

 

부인 말이 백번 옳아요.

다시 취직하면 꼭 하나 들도록 할께요.

그런데…설마…저를 보험금 땜에 죽이시진 않을거죠?

 

아 이거 왜 이래.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명색이 불교 신자, 는 아니래도 절 몇 번 다닌 경험으로

바퀴벌레도 못 죽이는 사람인데

살아있는 인간 목숨을 돈 땜에 죽이겠냐고.

 

오늘 라디오 듣다가,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기분이 너무 좋아지길래

(가사 내용이 뭔지 전혀 모르면서도)

이 노래 참 좋네…이 노래 들으니 기분이 좋아지는게 당신을 마구 껴안고 싶은 것이.

했더니,

허거걱 하면서 정말요? 정말요? 하더니,

 

지금 옆에서 기타 치고 있어요.

 

이게 아까 당신 좋다고 한 그 노래예요.

 

하면서.

 

응. 그래.

저기 머시냐. 콧구멍 벌렁대며 노래는 부르지 말고 그냥 기타만 쳐.

 

기타는 잘 치면서 또 노래는 왜 그리 못하는지.

 

대체적으로 저는,

인생이 살만 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며칠 전에도,

내 나이 마흔까지 이 아파트에선 못 살아.

2년 안에 이사가고 말테야.

 

라고 또 남편을 들볶았지만,

2년 후에 이사를 못 가게 되더라도, 아마 또 내 나이 마흔에 아마 저는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아, 라고 위로하면서

여전히 발전없는 인생을 살고 있을 확률이 크지만.

 

공부를 못해도 걱정이 없는 뱃 속 편한 내 조카 녀석이나,

이렇게 깝깝하게 살아도 여전히 인생 살만하다고 하는 나나,

루져들도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진정한 유토피아라 믿으며,

언젠가는 나도 집에 세탁기 놓고 살 날이 있으라는 희망으로 빨래들 카트에 구겨 담으며 명절 준비 들어가는 이 시점에,

 

 

오늘의 인용구, 로 이번 칼럼을 마치렵니다.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여, 행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