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남편이 직장에서 어이없는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다.

정신 하나도 없이 분노로 점철.

 

2월

 

어찌됬든 상황이 이리 됬으니, 이번엔 내가 두 팔 걷어 부치고 생활 전선에 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력서 손봐서 돌리고 몇 군데 면접.

오라는데 한 군데도 없음.

 

3월

 

아프기 시작.

왜 생리가 끝났는데도 생리통이 지속되는 건지,

산부인과 가고 초음파 찍고 다시 산부인과 가서 의사와 상담을 하고.

그래도 생리만 끝나면 없어지던 생리통이라 그간 참아왔는데, 이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내 몸 안에서 대체 무엇이 잘못되서 이런단 말인가.

 

4월

 

인터넷을 뒤지고

의사를 다시 만나고 초음파를 또 찍고.

내 통증에 대한 시원한 대답을 못들은 채로 나는 매일 매일 아프다.

한국에 가기로 결심.

거기서 검사를 더하고 수술이 필요하면 그곳에서 하리라.

한국행 비행기표 예약.

 

5월

 

셋째 성과 한국 도착.

제주도 가다.

내 평생 이런 좋은 호텔 방은 처음이다!

그 좋은 호텔 방에서 역시나 통증과 싸우다. 아프다…너무 아프다…

개인 병원을 거쳐 대학 병원이란 곳을 가고, 좋은 기계로 초음파를 다시 찍고,

드디어 그렇게 궁금하던 원인을 알게 되다.

자궁과 오른쪽 난소와 직장의 유착.

자궁섬근종. 그로 인해 자궁은 생리를 거듭하면서 계속 커지고

비대해진 자궁이 난소를 누르고 직장을 누르고 그러다 보니 세 장기가 뒤엉켜 버린 지경이 되다.

자궁을 하루라도 빨리 떼내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말.

수술 전에 이것 저것 볼 일을 보고 싶었다.

만날 사람 만나고 쇼핑도 하고.

상태가 많이 안 좋다. 밖에 나가는게 안심이 안된다.

멀리 창원에서 날 만나러 온 사람, 겨우 두 시간 있다 허겁지겁 택시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너무 미안했다.

여태 남편 앞에서만 보이던 통증을 셋째 성과 이모가 보게 되다.

입에 수건 물고 울면서 방바닥을 기는 모습에

이모는 어쩔 줄 몰라 하시며 차마 못 보시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시다.

지금 그냥 이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다.

정말 너무 아프다…

죽고 싶도록…그렇게 아프다..

 

 

6월

 

수술 받다.

좋은 병원, 좋은 의료진. 잘 선택했다는 믿음으로, 희망을 품고 수술실로 가는 침대에 오르다.

이런 수술을 받아야 하는건, 분명 안 생겼어도 좋을 일에 불행은 맞지만

그래도 난 참으로 운이 좋은 경우다.

이렇게 한국까지 왔고, 혼자도 아닌 셋째 언니가 이렇게 함께 와서 내 옆에 있고,

이건 죽을병도 아니고, 난치병도 아니고, 그저 수술만 하면 나아지는 병이다.

수술이 잘 되기만 하면 되는.

거기다 셋째 성은, 안입고 안쓰고 죽어라 아끼고 아껴서 모은 돈으로 2인실 병실을 예약해 줬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입원 생활하라고.

2인실에서의 다른 한 쪽 침대. 환자와 간병인 모두 다 엄청나게 시끄럽다.

나와는 극과 극으로, 평소에 싸움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셋째 성,

간호사 스테이션에 가서 목소리 부들 부들 떨면서 항의하다.

수술 환자와 치매 환자를 같은 병실에 넣으면 어떡하냐고,

수술 받고 와서 지금 한 순간도 조용히 쉬지를 못하고 있다고,

일인실로 갈 테니 옮겨 달라고.

일인실은 2인실의 또 두 배. 하룻밤 46만원.

빈 병실이 없어서 못 옮기다. 다행이다.

 

 

7월

 

6월 말에,

수술은 더할 나위 없이 잘 되었다 하고,

제일 싸구려 티켓이었지만 공항에서 항공사 배려로 좋은 자리도 받아서

다시 뉴욕에 잘 왔다.

세관에서 짐이 많다고 짐 푸는대로 보내길래, 수술 보고서 영문으로 떼온 것 들이밀며

허리 아프다고 바닥에 주저 앉으니, 세관 직원이 휠체어가 필요하냐고 묻고는

골치 아픈 일 피하려고 하는지

화급히 그냥 가라고 한다.

짐 풀면 흑염소 뺏길까 싶어 엄청 걱정했는데, 진짜 잘 됐다.

난 역시 임기응변의 천재다.

 

집에 오니 남편은 남 같기만 하고, 영 정이 안가는 것이

몸조리 해야 하는 사람한테 도나쓰나 내밀고, 취직할 생각은 않고,

오후까지 잔다. 마음이 답답하다.

시댁이라도 가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열흘 일정으로 시댁에 가다.

시댁에서 남편은 시아버님한테 옴팡 깨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나만의 즐거움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몸으로

펜실베니아 친구 집 방문, 그리고 바로 다음 달 초 버지니아까지 출동.

 

8월

 

남편은 역시나 자꾸 남 같다. 자꾸 미워지려 한다.

한국의 사촌 언니, 파리 여행 제안.

꼭 가야지 마음 먹다.

안 그러려고 하는데, 우울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마음이 자꾸 왔다 갔다 한다.

수술 후 경과를 보기 위해 산부인과로.

영문으로 뗀 수술 보고서 들고 주치의 오피스로 신랑과 손잡고 가다.

보고서를 읽은 주치의, 굉장히 수술 잘하는 의사가 했나 보다고,

어떻게 이런 수술에 출혈이 100ml 밖에 안 될 수가 있냐고.

100ml면 우우 한 컵도 안되는 건가?

수술 전에, 자궁과 직장 분리가 힘들 수 있다고 출혈이 심하면 수혈하게 될 수도 있고,

그래도 출혈이 심하면 중간에 개복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었다.

내가 수술 중 흘린 피의 총 액은 고작 100ml.

셋째 성 말마따나 난 수술이 체질인가?

의사가 묻는다. 자궁경부는 어찌 됬냐고. 수술 리포트에 자궁 경부 얘기가 빠졌다고.

자궁 경부 문제는 수술 전에 내가 특별히 질문한 부분이라고,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제거하지 않기로 했다고,

자궁 경부는 남겨둔 걸로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대답.

의사, 내진 해보면 알 수 있다고.

내진 결과. 자궁 경부 없다!

헐…그거 그러지 말라고 수술 전에 몇 번을 물어 봤는데…

수술하고도 아무도 나한테 자궁 경부도 제거 했다고 얘기 안 해줬는데…

의사 말로는, 미국 같은 경우, 현재 문제를 일으키는 장기만 제거하는 것이 수술의 원칙이란다. 차후에 자궁경부암이 걸릴 지도 모른다고 자궁 적출하는 환자, 자궁 경부까지 그냥 제거해 버리지는 않는다고.

그렇지만 크게 상심하지는 말라고 한다.

이 시점에 자궁 경부가 있고 없고는 부부 관계 하는 데에만 살짝 지장이 있단다.

질이 좀 짧아진다는 것 뿐이라고.

그러나 질은 또 신축성이 우수하기 때문에 아무 걱정 안해도 된다고.

 

의사는 남편한테 많은 얘기를 했다.

인내심을 가질 것, 부인의 마음을 많이 헤아려 줄 것,

부부 관계를 다시 시도할 때 100% 부인 위주로 갈 것, 등등.

 

닥터 오피스를 나서는데, 가슴 한 구석에서 막 짜증이 나려고 한다.

자궁경부까지 잘랐는지 난 정말 몰랐는데…덴장. 왕짜증.

친구 부부와 저녁 약속이 있었다.

울지 말자. 우울해 하지 말자. 저녁이나 맛있게 먹자.

저녁 맛있게 먹고 맥주 두 잔씩 하고 집에 들어 오다. 그냥…받아 들이자.

 

9월

 

파리 여행

남편이 그저 밉기만 해서 같이 있고 싶지도 않고,

아조 잘 됐다, 하고 파리로 떠나다.

 

10월

 

남편한테 폭발.

이 남자 내다 버릴까 어쩔까.

난 어디로 갈까. 어떻게 살까.

 

11월

 

남편과 화해.

전 심장으로 다시 남편을 받아 들이다.

이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사랑에 빠졌을 때,

그 때의 내 마음 찾기가 지금까지의 화두였다. 그 마음을 찾다..

사랑해.

언제나 사랑했어.

그걸 잠깐 잊고 있었어서 미안해.

사랑해. 많이 사랑해.

 

12월

 

이렇게 끔찍한 한 해가 드디어 갔다!

신나 죽겠다.

일 년도 더 올해처럼 살라 하면 나는 나가 떨어질지 모르겠다.

새 해엔

남편은 다시 직장을 잡을 것이며

나 역시 직장을 잡겠지.

둘이 열심히 일해서 올해 진 빚을 갚아 나가고,

내가 내가 정말 더 이상 어디가 알 수 없이 아프지만 않는다면

보통 사람들 만큼의 에너지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올 해보다는 아주 나은 한 해를 보낼 것 같다.

이유없이 기력이 딸리는 것, 잠을 못 자는 것, 이것만 해결되면

나도 정말 세상 돈 다 쓸어 모으며 일만 하고 살 수도 있다!!!

 

어제는

친구 부부와 저녁 먹는다고

오랜 만에 대처로 외출을 했다.

번잡한 차이나 타운에 가서 저녁을 푸짐하게 먹고

술집으로 자리 옮겨 당구도 치고.

당구를 잘 치기는커녕 완전 초보인데, 디게 잘 맞았다. 너무 신기했다.

내가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는 걸 아는지 친구는 계속 내 사진을 찍어준다.

폼이 그럴싸 하다며.

사진 속의 나는, 폼은 정말 꽤 잘치는 사람 같다.

사진 보면서 다들 저 얘기 하면서 웃었다.

 

오랜만에 콧봐람 쐬고 오니 기분 전환 제대로 되는게 아주 좋다.

 

새해 소망.

 

돈 안 좋아하는 척하는 컨셉은 올 해로 때려치고

내년엔 돈에 올인하는 한 해를 보내련다.

 

좀 있다 남편이 리커 스토어 가서 샴페인을 사오기로 했다.

 

작년에 세 병을 사오겠다길래 둘이 세 병은 좀 과하지 않냐고, 두 병만 하자고 했더니,

한 병은 원래 마시는 크기, 한 병은 이따시 만한 파티 사이즈로…

그러면서 자기는 내 말대로 두 병만 사 왔다고 방긋방긋.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지만…마시다 보니 같이 앉아서 다 마신 나도 문제다.

다음 날, 숨만 쉬어도 토할 것 처럼 정말 정말 최악의 술병이 나고,

지집이 정초부터 술 퍼마시고 술병이나 났다고 노여사한테 엄청 깨지고,

나에게는 술병 난 아침에 해장국 끓여주는 아내가 없다는 사실에 비통해 하던

작년 뉴 이어스 이브와 새해 첫 날을 상기하고

이번엔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자 다짐한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

 

그래서 지금 북어 콩나물국 끓여 놨다. 내일 해장하려고.

이제 마시기만 하면 된다.

 

올해 이런 저런 많은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이만하면 잘 해낸 것 같다.

이만하면 잘 견딘 거라고, 앞으로 더 잘하면 되는 거라고,

내 자신을 기특히 여기다.

 

그리고 감사하다.

 

열 몇 살 적부터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 생각.

나는 대체 세상에 왜 나온건지,

나는 왜 잘하는 것도 하나도 없고, 아무 것도 가진게 없는지,

남들한테는 쉬워 보이는 일들이 왜 나한테는 항상 힘든건지,

무슨 영광을 보자고 이 재미도 없는 인생을 계속 하루 하루 살아야 하는건지…

 

이제는 더 이상 인생이 지루하다는 생각은 안하게 되다.

 

자판에 두들긴 마음의 수다에 불과한 나의 이야기를 재밌어 해주고

용기가 되고 힘이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 모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