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부터 게으름의 극치를 보이느라…

사실, 새해가 됬다고 사람이 갑자기 바뀌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남들 작심 3일 하는 동안 나는 며칠만 더 하던대로 하자..하고

조카한테 빌린 책 읽는다고 마음 내키는대로 뒹굴 뒹굴…

 

지난 달에 둘째 언니 6학년짜리 딸래미가

무슨 백과 사전처럼 두꺼운 책을 열심히 보고 있길래

무슨 책이냐고 물었더니 옆에서 셋째 성이

여자 고등학생이 뱀파이어랑 사랑에 빠지는 얘기인데

요즘 틴에이져 여아 아이들한테 난리라고, 이번에 영화도 나왔다고 설명해 주더군요.

 

내가 저 아이 커가는 과정에서 앞으로도 저 아이와 계속 대화를 하려면

저 아이의 문화를 알아야 겠다 싶어서

제가 빌려 달라고 했어요.

 

이모라고 조카를 이뻐만 하면 다 이던 나이가 벌써 지나서

저 아이가 6학년. 다행히 한국말을 혀 꼬부라지는 발음 없이 또박또박 잘 하고

영어 만큼은 아니어도 표현력도 제법 좋아요.

어디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어머나? 얘 여기서 태어난 애 맞아요??’ 하고 깜짝 놀랄때가

제가 저 아이랑 다니면서 제일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예요.

발레를 잠깐 배우러 다녔을 때 발표회를 한다고 해서 갔는데

우리 현경이가 한국말 부분 인사말을 맡았더군요.

영어로 인사말 할 아이들은 많은데 한국말이 또박또박 되는 아이는 드문 까닭에

마이크 잡고 나서기 좋아하는 현경양이 저 자리 차지하고.

 

원래 말이 빠른 아이였어서 애기 때도 곧잘 사람들 놀래켰었 거든요.

개월 수 보다 말은 빠른 편이고 몸집은 또 작은 편이니

두 돌쯤 됬을 때도 돌 조금 지난 것 처럼 보일 만큼 작았는데

고런 애 장보러가서 카트 앞자리에 싣고 끌고 다니면서 얘기 하고 있으면

옆에서 아줌마 한 두 명은 꼭 놀라서 물어 보더라고요.

‘어머나? 이렇게 쪼그만 애기가 무슨 말을 이렇게 잘해요?’

너댓살 됬을 때 한국말 아주 청산유수 였거든요.

한 번은 친구랑 미장원 가면서 쟈를 데리고 갔는데, 다섯 살 때 였어요.

제가 친구한테

‘내가 미장원 간다니까 머리 짧게 싹둑 자르고 올까봐 폴 지금 잔뜩 쫄았다’

고 했더니,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던 현경이가 저를 빤히 보면서 저더러 그러는 거예요.

 

‘이모. 근데, 아무리 폴이 긴 머리를 좋아해도

그 머리는 이모 머리니까 이모가 자르고 싶으면 잘라도 되는거야’

 

제 친구랑 미용실 아줌마랑 눈이 똥그래 졌었어요.

조그만게 말 잘 한다고.

제 친구가, 이모 영향이 무섭구나. 저 쪼끔한 것이 벌써부터 페미니스트네..

 

그리고 나서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먹고, 쉬야 한다고 해서

화장실 데리고 가서 안아서 변기 위에 올려주고는 아이 쉬야 하는 동안

제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아이 쳐다 보면서

‘우리 현경이는 어쩌면 이렇게 이쁠까…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도 예쁘고 쉬야하는 궁댕짝도 이쁘고…

안 이쁜 데가 없네.’

했더니, 또 저를 빤히 보면서

 

‘이모. 나한테 이쁘다는 소리 좀 그만 해.

사람은 이쁘게 생긴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다른 사람을 다 사랑하고 사는 마음이 중요한 거야’

 

제가 너무 깜짝 놀라 가지고, 그런건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더니

기독교 방송에서 어떤 목사님이 그러셨다나..

제가 창피한 와중에 다섯 살짜리 애 앞에서 말발이 찌그러지면 이모 위신이 안 서지 하면서 한 마디 겨우 했어요.

‘그러니깐…현경이는 그 마음부터 이쁘니까 이모가 다 이쁘다고 하는거지..’

휴우…

 

이런 애도 앞으로 계속 학교 다니면 저 잘하는 한국말 다 잊어 먹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많이 서운했었어요.

1학년 되고, 2학년 되고,

이제는 저 아이가 한국말보다 영어가 더 편하다는게 확연히 표시가 나기 시작할  무렵에

한국에 가서 친가 할머니 할아버지랑 여름 방학 보내고 오더니

슬슬 꼬부라지려던 한국어 발음이 정확하게 잡혀서 왔더군요.

얼마나 다행이던지.

 

이모는 너 다 컸을 때 너랑 영어로만 얘기해야 하면 슬플 것 같아.

현경이가 한국말 안 잊어 버렸으면 좋겠어.

 

라고 아이한테 내 속마음을 대놓고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내가 저 18살 되면 주려고

태어났을 때 부터 써오는 육아 일기도 있는데,

그 때 가서 어깨 한 번 으쓱 하면서 '나 한국말 못 읽는데?' 이러면 난감 하잖아요.

아이가 급한 마음에 영어로 좌르르 얘기를 쏟아 놓고 나면 꼭 한국말로 다시 해달라고

부탁을 하곤 했어요.

 

현경아, 지금 한 말 한국말로 다시 해 줄래? 천천히 해도 괜찮아.

이모가 너 영어로 한 말 잘 이해를 못 했어.

 

하고요.

둘째 언니 말로는 아이가 영어가 더 편해지면서

학교 갔다 집에 와서 수다를 늘어 놓는 일이 없어졌다 하고,

그래도 엄마 아빠 동생이랑은 꼬박 한국말을 쓰긴 하고.

저 쬐깐한 거 눈에도 너(이쁜아짐)는 영어 좀 되는 거 알고

너만 보면 영어로 지껄이는 거 같다고.

나한테는 저렇게 말 안 붙인다고.

집에서 말수가 줄어 들었다고 하더군요.

한참 저렇게 저한테 영어로 지껄이는 것에 재미 붙었을 때도,

몇 년을 꾸준히 저 아이 만날 때마다

‘우리 다같이 한국말로 얘기하는 거야~’ 라고 버릇을 들였더니

3학년, 4학년, 5학년 이렇게 커 가면서 한국말이 이제는 틀이 잡혔어요.

교회 한글 학교 덕분에 읽기, 쓰기도 진작부터 다 하고

셋째 성이 한국말로 된 책 가끔 사주면 그것도 읽고요.

 

이제 문제는, 대화 소재의 빈약.

올해 중학생 됬는데, 만나서 ‘현경아 학교 어때? 힘들지 않아?’ 이런거 물어 보고 나면 끝.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어떤 과목이 특히 힘들고, 방과후에는 무슨 활동을 하는지,

이런 것들을 매번 일괄적으로 묻기도 너무 형식적이고 취조스러운 것이.

친구처럼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얘깃거리’가 없는 거예요.

얘 인제 다 컸구나. 자기 생활이 있는 애라 이제는 더 이상

이모 강아지, 이모 토깽이, 해가면서 궁댕이 두드려 주고 뽀뽀만 하면서

이뻐해 줄 수 있는 단계가 다 지나 버렸구나.

 

대화라는게 상대가 누구든,

자 우리 대화 합시다, 얘기 시작~! 하고 말을 줄줄줄 늘어 놓는게 아닌데,

공통 화제라는게 있어야 하고 생각들이 오고 가고 교환이 되야 하는데,

나는 저 아이랑 할 말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거에요.

아이가, 내가 이말을 한들, 저 쪽에서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듣기나 하겠어?

하면서, 그냥 말을 말자…로 되버릴까봐 부쩍 위기 의식 느끼던 요즘이었는데.

 

내 자식 키우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모처럼,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자기 만의 세계로 방문 닫고 들어가버리는

집 안에서 말 수가 적어지는 틴에이져의 모습이 저한테도 현실처럼 다가오는 것 같은 것이..

저것도 조금만 더 있으면 그러려나??

지들이 참 잘났어…머리 좀 크면 부모한테 보여 줄 게 지들 등짝 밖에 없나.

지 방으로 기어 들어가서는 문 닫고 뭘 그리 비밀스럽게 하려고.

그러다 어느 날,

나는 내 자식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그런 충격을 받을 수도 있고.

 

아휴…그러니까 내가 쟤랑 얘기를 계속 나눠야 하는데…어쩐다.

무슨 얘기를 한다.

 

저 아이한테 한국말을 배워야 한다고 아이가 크는 내내 주장하면서

나는 미국에서 크는 저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 무슨 노력을 했나..

이걸 어찌한다?

하던 차에 잘됐다! 하고요.

부모의 영어가 미국 사람들 같지 않은 미국에 사는 한국인 가정의 2세로,

저 아이가 집에서 외로움을 느끼면 안될텐데 하는 걱정도 있던 차에

지가 읽는 책 이모인 내가 좀 보겠다 하면, 우리 집에 나 말고도 영어로 된 책 읽는 사람이 있구나 해서, 아이 가정 교육에도 좋을 것 같고.

그래서 1권을 빌려 달랬더니 아이가 너무 좋아 하는거예요.

 

함께 크리스마스 보내러 시댁가면서 저 보자마자 ‘이모 내가 그 책 가져왔어!’

하길래 전 며칠 새 그새 까먹고,

‘책? 무슨 책?’ 했더니 요 눔 가시나 눈알을 굴리면서

‘아휴..이모가 빌려 달랬잖아. 트와일라잇!’

아 가스나 요거.

내가 사는게 얼마나 복잡한 사람인데, 그거 바로 기억을 못할 수도 있지.

나 원…그래도 말은

 

‘아..맞아. 그래 고마워’

 

하고 치사스럽게 받아서는,

둘째 날 밤에 자기 전에 잠깐, 딱 다섯 페이지 읽고 다음 날 아침에

아침 먹으러 식탁 앞에 앉아서,

‘현경아, 이모 그 책 어제 시작했어’

했더니, 아이 눈이 반짝 반짝

‘이모, 그거 좋지? 재밌지?’

‘근데 이모 아직 다섯 페이지 밖에 못 읽었어. 어제 자기 전에 잠깐 읽은거라.’

‘그래도(다섯 페이지만 읽었어도) 좋지? 그 책 좋지?’

아이가 신나 하더라고요. 그래…이모가 사명감을 가지고 꼭 읽으마.

마지막 페이지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읽으마.

대체 이 책은 왜 에누리 없이 500 페이지란 말이냐 덴장.

 

그러고는 집에 와서 며칠 또 던져 두고 잊어 버리고 있다가,

집어 들었죠.

샤워도 안하고 머리에 떡지고,

밥 하기도 귀찮아서 오랜 만에 일식집에서 데리야끼 박스도 배달시켜 먹고,

밥 먹고 나서는 남편더러 치우라 하고 바로 다시 책 붙들고.

 

무슨 고딩들 연애 얘기로 몇 백 페이지 짜리 책으로 몇 권씩이나 나오지?

하면서

내가…사랑하는 조카의 성장 문화를 이해해 보겠다는

기특한 각오로 내가 이걸 읽기는 하겠다만,

지금 내가 이 나이에

내 앞가림 할 것도 산더미 같은 이 시점에

고딩들 연애 놀음하는 소설 따위나 읽게 생겼나...

속으로 자신한테 혀를 끌끌 차면서…시작을 했더만…

 

하…요 넘 요거...미치겠네...

50페이지 쯤에선 그냥 쓰러지기 시작했네요.

 

 

흐미나…에드워드야.

내가 가정은 지킬 참이지만...나도 너 사랑한다…

이건 진심이다…

 

 

책 읽기를 드라마 보듯이 하는 바람에, 옆에서 남편이 우스워 죽겠다고 껄껄껄.

에드워드군 대사 마다 으아악~~~ 소리 지르고 쓰러졌더만.

대체 왜 그러냐고.

잠깐 책 덮고 다다다다 줄거리 설명.

얘가 피닉스에 살다가 워싱턴 주 포크로 이사를 왔는데, 에드워드는 뱀파이어고

어쩌고 저쩌고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자기 뱀파이어들 남매들이랑만 맨날 점심 먹다가,

우리의 여주인공 벨라를 친구들 테이블로부터 불러내서 드디어 둘이만 앉았는데,

벨라 친구들이 막 째린다고 함서, 에드워드가 이제 넌 내꺼야.

 

“I may not give you back, though,”

 

했어. 으아악~~~ 그 다음에 계속 쓰러질 때마다 에드워드 대사 읽었다가

여자 목소리로 톤 바꿔서 벨라 대사 했다가,

주요 하일라이트 대사를 남편한테 읽어줘 가면서.

 

샤워도 안해서 머리에 떡 진 아줌마가 열 일곱살 먹은 녀석 땜에 온 몸이 근질거린다고 주접을 떨면서,

 

오 마이 갓. 나 현경이한테 전화해야 돼.

슬립오버 하자고 해야겠어. 나 현경이랑 에드워드에 관해 얘기를 해야만 해.

 

제가 저 책을 읽는 내내 남편의 주요 관심사는 ‘야한 얘기’가 있는지,

있다면 어디까지인지 였어요.

우리 현경이 아직 열한살 밖에 안됬는데, 막노는 고딩들 얘기면 어떡하냐고.

사실은 저도 저 부분 상당히 염두에 둔 부분이었거든요.

뽀뽀 밖에 안 나온다. 뽀뽀가 끝이다, 저도 안심을 하고 남편도 안심을 시켜 줬고요.

남편은 진도를 한 발 더 나가서

곧 현경이 성교육도 생각을 해야 한다고.

엄마인 둘째 언니도 둘째 언니지만, ‘미국에서의 현실적인’ 성교육은 아무래도 당신 몫이 되지 않겠냐고. 아주 진지하게.

 

그래서 제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서,

 

 

"뭐? 성교육? 내가? 현경이한테 성교육을 내가??? 뭐라고 하지?? 콘돔 꼭 쓰라고???"

두서없이 마구 말을 하는데 콘돔 소리 나오지 남편이 깜짝 놀라서 난리, 난리를.

"그럼 뭐라고 해? 현실적인 성교육을 어떻게 해???"

물었더니, 비장한 목소리로,

 

 

"무조건 남자애들을 피하라고 해야죠..

남자 놈들은 다 동물들이니까.

손도 잡지 말고 뽀뽀도 하지 말고.

현경이한테 어떤 놈이 손대는 거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하면서 고개를 절레 절레…

 

그것이…현실적인 성교육이요 아자씨? 무조건 남자애들 상종을 말라 하는게?

한 순간이나마 저 아저씨한테서 똑똑한 소리가 나올 거라고 기대를 했던 내 자신이

이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는 것이…

자기는 고등학생 때 여학생이랑 연애 안 했남? 웃기셔~

 

하긴 나도…내가 중학교 때 유행이던 하이틴 로맨스는 이것보다 강도가 훨씬 셌는데

나는 벨거 벨거 다 봐 놓구는, 조카한테 이러네.

이렇게 세대가 반복하는 걸까요?

나도 놀고 다 놀아 놓고서는, 아이한테는 이렇게 전전긍긍을 하게 되니..

 

성교육 부분은 더 고민을 하고 더 공부도 했다가

2년쯤 후에 아이 열 세살 정도 되면 들어가야 겠어요.

지금은 이 이모 눈에는 아직도 너무 애기같은 아이라…

아직은 눈썰매 타면서 소리 지르고 깔깔깔 넘어 가는 애한테 성교육 좀 기다려도 되겠죠?

 

우선은 열한살 먹은 애랑 서른 여덟 먹은 이모가 머리 맞대고

영화 속의 에드워드가 잘 된 캐스팅인지 어떤지부터 토의를 하고

영화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결론도 내리고

에드워드가 살짝 벨라를 푸쉬하는 태도는 저는 마음에 안 든다고 얘기할 참이예요.

벨라는 그토록 춤 추러 가는게 싫다는데 어거지로 프람을 끌고 가는 것은

이모 보기엔 별로 좋지가 않다고.

내가 싫은 건 싫은 거고, No means no야.

현경인 앞으로 남자 친구 사귀어도 너가 싫다는거 억지로 하게 하려는 녀석하고는 놀지 마라.

 

하면, 이모는 재밌는 책 빌려 줬더니 괜한 잔소리를 하네.

그러려나?

어른 노릇하기…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