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심기가 편치 않아서 인상이 더 드러워 보이는지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자꾸 나를 흘끔 흘끔 쳐다보는 것만 같다.

그 중에 나한테 말 붙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는것 같다.
 

아줌마, 그 등에 지고 있는 건 뭐예요?
 

그럼 난 대답하리라.
 

우울이예요. 신경쓰지 마세요.

그제는 새벽까지 잠을 못 이뤘다.

내 지나간 아가씨 신분 시절에 너무 안이하게 살았다는 자책감 때문에.

왜 나는 좀 더 부지런하지 못했던고,
왜 나는 노는 물을 좀 더 잘 선택하지 못했던고...

드라마에 항상 나오는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듯하나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재벌 2세 남과
가진 것 하나없는 그러나 사고방식만은 건강한 천방지축녀와의 사랑 이야기,

거기다 덤으로
재벌 2세의 주변인으로
가난한 천방지축녀를 재벌2세의 그늘에 가려
전면적으로 나서지는 못하고 우물쭈물 열 발짝 뒤에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조건은 2세 남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얼굴은 더 잘생겼고
마음은 더 따뜻한,

조건이 밀린다 해도 하고 다니는 입성으로 보아
결혼한다면 전세금 정도는 나올 법한 제 3의 남자까지.

저게 실제로도 많이 일어나니
주구장창 드라마에서 써먹는 거겠지.

그럼 나는 저렇게 실제로도 많이 일어나는 껀수를
젊디 젊은 20대에 왜 한번도 건지지를 못했냐 이 말이다.

그 수없이 오고 간다는 재벌 핏줄들은 어찌하여
이 뉴욕에서 내 눈을 피해 꽁꽁 숨어다녔냐 이 말이다.

덴장.
 

천방지축으로 따지면 나는
그 주인공 여자들 다 합친 것 보다도 한 수 위인데..
 

뉴욕에 출장 온 재벌 2세가,
드넓은 5th 애비뉴의 광활한 아파트에서 일하는 아줌마 땜에 열받아
집을 뛰쳐 나와
홀로 외로이 센츄럴 파크를 거닐다,
 

아...이번엔 한국말을 알아듣는 가정부를 구해야겠어...
내 영어가 당췌 안느니...
 

이런 말을,
역시나 나홀로 방황하던 내 옆에서 지껄였더라면
당장 내가 그 집에 가정부로 들어갔을 터인데.
 

그랬다면
포스트잇 메모지 정도는 사장 서랍 뒤져서 쓰지 않고
내 자비로 들여 집안을 메모로 도배를 했을텐데..
 

사장님, 설탕은 슈가예요.
혼자서 커피 타 드실 때 소금 말고 슈가라고 써진 가루를 쳐 드세요~
 

사장님, 소금은 쏠트랍니다.
고등어 자반이 조금 싱거우면 쏠트라고 써진 가루를 조금 더 쳐 드세요~

사장님, 후추는 블랙페퍼거든요.
곰탕 드실 때 잊지 마시고 블랙페퍼라고 써진 거 알맞게 쳐 드세요~
 

후후~~

나도 이렇게 자상한 메모들로 출생비밀2세남의 마음을 확 휘어잡았을 텐데...

출생비밀2세남이 사업상 중요한 계약건으로 디너 초대를 받고 보니
상대의 부인이 마침 한국 여자에
그 부인의 출신 학교가 마침 사대문안 유명난 날나리 모여고,
아놔, 우리 가정부도 그 모여고 출신인데?

이래서 내가 그 디너 초대에 함께 갔더라면
나도 화끈하게 계약 성사 도우미 노릇 톡톡히 했을 터인데..
 

오모모? 선배님~~
선배님, 혹시 면도칼 씹는다는 칠공주는 아니셨죠?
그러시다면 지금 말씀해 주세요.
제가 지금 바닥에 바로 원자 폭탄 박을께요 ㅎㅎㅎ

이러면서, 계약 따낸다 난.

혹시라도 출생비밀2세남이 나한테 마음이 없더라도
차선책으로 전세금가능주변남이라도 건졌을텐데.

집에 빵도 떨어지고 일자리도 짤려 열받는 차에
브루클린 브릿지에 고물 자전거를 세우고
훌쩍 훌쩍 울고 있을 때
그 전세금가능주변남이 나타나 자전거 고쳐주고
눈물 닦으라고 손수건 주고,

그럼 난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굴도 안 쳐다보고 돌려보내지 않고

형씨, 마음에 드니 술 한잔 합시다,

라고 했을거다.

술 뿐이랴 카드로 긁고 2차로 노래방까지 접대한다 나 같으면.
남자들은 혼자 노래 부르는 걸 힘들어 하므로
옆에서 탬버린 1분에 200타 맹렬히 쳐주며 노래 부르는걸 열심히 도와준다.

이렇게 아쉬운대로
전세금가능주변남이라고 꼬실 수 있었을텐데.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황망한 20대 싱글 시절을 보내는 동안,
뉴욕에 수없이 오간다는 그 부잣집 도령들 다 어딨었냐고!!!!!

출생의 비밀 다 감싸줄 수 있다고요.
그래봐야 시어머니 둘이지 셋이야 되겠냐고요.
어차피 운전기사가 자가용으로 모셔다 주고 또 모셔 오고 할텐데
까짓거 명절에 한탕 뛰다 두탕 뛰나
거기서 거기지 뭐.
 

그 사람 진짜 엄마가 누나라 부르던 사람이던
아빠라고 부르던 사람이 외할아버지던
호칭이야 교통 정리 차차 해가면서 부르면 되지 그게 뭐 대수냐고요.

문제가 뭐였을까......
 

새벽에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내가 교통편을 도보와 지하철로 국한했던게 문제였나 보다.
아무리 없는 살림이라도 어디서 훔쳐서라도
자전거 하나 구해서 타고 다니는 거였는데...

또 하나,
동전 내던지는 분수있는 공원엘 안 다녔다는 것.
동전을 분수에 내던지는건 미친짓이라는 평소 신념이 문제였던 거다.

그 동전 하나,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사는데
대체 난 왜 그렇게 미련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싱글이던 그 당시
부잣집 도령들은 죄다 파리로만 갔었던 것일까?

누가 이런 정보라도 줬으면 내가 땡빚을 내서라도
파리로 가 죽치고 개겼지...

내가 이미 아줌마가 된 시점에서 그런 주옥같은 정보가 담긴 드라마를
그제서야 하면 어떡하냐고요.......
 

정보가 없이 막 사는 사람은
타고난 천방지축도 제대로 힘을 못쓰고 이렇게
뉴욕 변두리에서 찌그러져 사는구나.

부잣집 자제들이 즐겨 찾는다는 나이트는 술값이 비싸서 못가고
오로지 꼰대들만이 죽때리는
변두리 나이트에서만 20대를 보내고 나니
나의 30대가 이렇게 꼬이는구나.

나처럼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신념 하에
남자 하나 잘만나 팔자 고쳐보겠다는 건강한 가치관을 가진 여자들이
설 자리는 정녕 이 땅위에는 없단 말인가.....

으윽.......
 

왜 오늘은 배변도 시원찮은 거야.
응가를 못했더니 배만 더부룩하게 나와선...에잇!!!

배 안에...... 똥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