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시부모님이 오랜만에 시내에 오셨어요.
바야흐로 두달여의 '겨울나기 대장정'에 돌입 하셨는데
첫  기착지로 가시는 길에 저희보러 어제  들리셨다 가셨네요.
춥디 추운 업스테잇 뉴욕의 시골집을 떠나, 소형차에 딱 필요한 짐만 간단히 싣고,
좀 더 따뜻한 곳에 살고 있는 친지들, 친구분들 집을 찾아다니며
무슨 순회 공연 하시듯이 이 집에 며칠, 저 집에 며칠, 이런 식으로
매년 두어달 겨울 여행을 하시거든요.

동네에 있는 지중해 식당으로 모시고 갔는데,
그 집에서 예전에 생굴을 한 번 먹은 적이 있는데, 너무 신선하고 좋았거든요.
어제  거기를 가니 저는 생굴 생각이 간절.
거기다 줏어들은 바로는 굴이 지금이 제철이라는 소리도 들은 것 같고,
제가 입맛이, 순 한국식 입맛인데, 또 이 생굴은 초장 찍어 먹는것 보다,
저런 미국 식당에서 주는 소스에 먹는걸 더 좋아하거든요.
칵테일 소스랑 홀스 래디쉬 섞고 또 그 위에 핫소스 듬뿍 얹어서 후루국 먹는게 초장보다 훨씬 맛있더라고요.
사실 다 빼고 핫소스만 있어도 되고요.

전 또 내일 죽어도 오늘 먹고 싶은건 먹어야 한다, 가 신념인지라,
남편은 실직했을 망정, 생굴 땡기면, 난 생굴, 먹습니다.
그리고 뭐 어차피 어제까진 주말이었잖아요.
내일부터 본격적인 부부 백수 생활 시작한다 치고, 오늘 나는 생굴을 먹으리라...하고
한 더즌 시켜서 아버님하고 사이좋게 6개씩 먹었어요.
(남편하고 시어머니는 생굴 취급안함)
아직 돈 있는데,  내일해도 될 걱정 오늘 미리해서 뭐 하나요.
그렇지 않나요?

괜한 걱정 미리 사서 해봐야 빨리 늙기나 하지 뭐.

시어른들하고 오붓하게 자리를 하고 있자니,
남편 사귀기 시작하고 처음 인사 드렸던 그 때나,
지금이나 이런 한결같은 느낌, 또 새삼 감사함이 들었어요.
두 분 보고 제가 결심한건, 아 나도 신랑이랑 저렇게 살아야겠다, 였는데
 이 달에 결혼 40주년 맞는 두 분을 어제  뵈니 정말 저 결심이 또 새로워지네요.

제가 가정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
여기서 말하는 가정교육이란, 무슨 중상류층 품위있는 집안에서 뭐 좋은 매너 이런거 배우는 그런 가정교육을 말하는게 아니고요.

가진거 없이 살아도 화목하게 사는 집,
가족간에 서로가 아껴주는 집,
힘든일이 있을 때 서로 힘이 되어주는 집,
뭐 이런 가정교육이요.

어릴 때는 엄마,아빠 큰소리로 싸우는 것만 보고 자랐고,
엄마가 감당해야 했던, 자식 다섯을 짊어지고 사는 인생의 생존의 버거움,
세상 어디에도 기댈데가 없는 그 절박함에 힘들 때마다,
본인도 그러고 싶지는 않으셨겠지만, 암튼지,
아버지 성을 딴 너희 무슨씨 종자들 다 웬수라고 꼴도 보기 싫다는 독설과
뒤이어 레퍼토리로 딸려나오는 극단적인 표현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고,

집에 막막한 일이 터질 때마다, 울며 불며 서로 원수처럼 손가락질 하고 악쓰는 것만 몸에 익히고 자란 탓에

화가 날 때 화를 건강하게 다스리는 법,
갈등이 생겼을 때 합리적으로 조율하고 이해하는 법,
책임 전가나 비난 대신 함께 마음합쳐 다독이는 법,
하나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처음 시댁에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갔을 때,
저집 명절 분위기, 가족들끼리 서로 대하는 분위기에 적응이 안되서,
신기하다 못해 짜증까지 났었어요.

남편 만나기 전까지는 여자고 남자고 미국인 친구라고는 사귀어 본 일이 없었어서,
미국 가정집을 가본 일도 저게 처음이었고,
'아니 미국 사람들은 가식적이라더니...가족끼리도 이리 완벽하게 가식을 때리나....?'
'이 냥반들 인생 참 피곤하게들 사시네....'

저 때만 해도, 아주 혈기왕성한 사회 불만 세력이었던 관계로
시니컬하기로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던 시절이었으니,

아니, 가족이란게 서로 면박주고 무안주고 하는게 가족이지,
어찌 말끝마다 땡큐, 플리즈를 입에 달고 살며 부모가 자식들한테 잔소리 한마디 안하고 덕담만 일관하는 집이 이게 무슨 가족이란 말인가...
내가 이 집하고 엮이면 나도 앞으로 이렇게 한 '가식'하며 살아야 하나?
아이...나는 진실한 삶이 좋은데...
이 집 식구들은 자기들끼리 화풀이 안하면. 그럼 화를 어데나 푸나???
밖에 나가서 싸이코 짓들을 하나??

저 사람들을 보면서 저런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웠더랬는데..
이제는 적응 마치고, 분석끝내고, 동화되가는 단계까지 들어 갔네요.

그래 이왕이면 무안주며 농담하는 것보다, 듣기 싫다면 안하는 것이 좋고,
(예, 생긴거 가지고 놀리고 뭐 그러는 것)
친한 사이일수록 예의 갖춰 말해서 해될 것이 없으며,
좋은 표현, 좋은 말이 가져오는 사고의 변화란 실로 놀라울 만큼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며,
갈등이 생겼을 때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부모님이 큰소리로 싸우는 모습을 자라면서 단 한번도,
정말 단 한번도 본일이 없다는 남편말에,
기절할 듯이 충격받고
아버님이 어머님한테 하시는거 보고,
이 남자는 자라면서 보고 배운게 이거 밖에 없으니, 나도 이 남자랑 결혼하면 이렇게 살겠구나....했습니다.

난 우리집이 그런게 가난에 찌들어 사느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는게 힘이 드니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런거라고 그렇게 생각 했었는데…
그게 돈이 문제가 아니었더군요.
그리고 돈이라는게 없을 수록, 그래서 사는게 힘들수록
더더우기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없이 살았기로 말하자면 시댁도 저희집보다 별 나을게 없는 집이거든요.

남편 자라온 얘기 들으면 저 못지 않고,
둘이 한국 극빈자, 미국 극빈자 대표끼리 만나서 결혼했다고 신혼여행 가서 한참 그 얘기 하면서 웃었었네요.

역시나 해답은 사랑이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사랑이 있으면 된다. 다 된다. 다 이길 힘을 얻는다.

시어른들처럼 그렇게 살아야지...하고서도
일단 살아 보니...
음....그렇게 안되더군요.  전혀.
왜냐면, 제가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요ㅎㅎㅎ
두 사람 사는게, 정말 한쪽만 잘해서는 잘되는게 아니구나,
제가 제 자신을 보고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화나면 혼자 미친소처럼 날뛰는 버릇.
공격적이고 과격하게 화를 내며,
일단 내가 화가 났기 때문에 상대방 말은 듣지 않겠다, 라는 태도에다
내가 자라면서 그렇게 진저리 치도록 싫어했던, 친정엄마의 독설 내뿜는 버릇.
그거 제가 고대로 갖고 있더군요.

그래서, 내가 바뀌지 않고는 우리가 시어른들처럼 사이좋게 살 수는 없겠구나...
하는 자각이 퍼뜩 들어서 신혼의 폭풍이 지나가고 부터는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네요.
사람 자라온 환경과 익숙해진 버릇을 버리는게 정말 쉽지않은 일이지만,

저한테는 불행하게 살고 싶지 않다라는 절실한 목적이 있었어요.
나는 정말 불행하게 살기 싫었거든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한테 독설로 깊은 상처를 주지는 않겠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지겨워하는 상황은 만들면 안된다...라는 절실한 이유가.

내가 계속 이러면, 결국은 남편도 날 지겨워 하겠지..
내가 엄마를 지겨워하는 것처럼.
하는데 생각이 미치니, 정말 정신이 퍼뜩 나더라고요.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 지난 인생이 얼마나 힘들었고 불행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하지만 난 엄마와의 만남을, 엄마와의 대화를 지겨워 하거든요..
이해해야지, 이해해야지,
잘 해드려야지, 잘 해 드려야지 하면서도
지친다, 힘들다, 이런 생각을 하고 혼자 짜증스러워 하고 버거워 하거든요.

엄마를 보러 간다고 하면, 한 번도 가벼운 마음인 적이 없어요.
그저, 그래야만 하니까,
이나마도 안하면 내가 나쁜 딸이 되니까, 내가 나쁜 딸이 안되려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엄마를 보러 가는 거지,
마음 깊은 곳에서 엄마랑 밥이나 같이 먹고 수다나 떨다 와야지,하는
가벼운 마음이 드는 적은 단 한 번도 없거든요.
두번 갈거 한 번만  가게 되고요.
전화도 두 번 할거 한 번만  하게 되고.

시댁을 간다, 시어른들 만난다, 하면 즐겁고 기분 좋아요.
참..
나를 낳아서 그리 고생고생해서 키워주신 엄마한테는 이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것,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네요.
나는 남편을 만나서, 세상을 향해 얼어있던 마음이 조금씩 녹았는데..
나는 이 사람을 만다고 부터 인간에 대한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의 힘을 느끼고
마음 고생은 이제는 더는 안해도 된다고 그런 안식처를 갖게 됬는데….
엄마는 아마도 아직도 그 마음을 녹여줄 안식처가 없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 연세에 혼자 알아서 밖에 나가서 물좋은 영감님 한 분 물어다 팔자 고치시라 하기도 좀 그렇고,
누굴 소개 시켜도 드릴래도 또 눈이 어지간히 높으셔야죠.
본인은 아직도 킹카라고 생각하시는 듯.
춤도 출줄 알아야 하고 여행도 좋아하며 두루 두루 풍류를 즐길줄 아는..
저희 어머니 칠십이 넘으셨네요.
그 연세에 두 다리로 멀쩡히 걸어만 다녀도, 감사해요, 할판이구만
댄스 플로어 화려하게 평정할 동반자라니..
연하를 붙여 드려야 하나..

엄마가 실은 다른 주에 계속 오래 계시다가 뉴욕 딸들 곁으로 재정착 하신지가 몇 달 안되세요.
엄마 다른주에 사실 땐 전화하면서,
어머니, 이 막내딸이 또 남자보는 눈이 좀 있으니,
뉴욕오시면 저랑 같이 영감님 찾으러 캬바레나 다니십시다 했는데,
결정적으로 제가 사교춤은 못 추는지라 현실성이 떨어지네요.

결국...자식들이 노모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는데,
저렇게 보면 또 내가 불효녀라 엄마의 안식처가 못되어 드린다...로 결론이 나서,
역시나 내가 맘보를 고쳐 먹던지 정신력을 더 키우던지 둘 중 하나란 소리가 되네요.

시어른들하고 브런치 잘 먹고, 계산서 달라는데,
시아버님이 남편 팔목을 굳쎄게 잡으시더군요.
(남편 직장 얘기는 안 했습니다.
좋은 여행길에 누가 돨까봐, 얘기 안 하기로 하고 나갔음)

아들아…이번엔 우리 차례다...

하시면서. 지난번 지지난번 다 저희가 모셨다고 이번 밥값은 당신들이 꼭 내시겠다고.
저는 한 번 더 우리가 우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옆에서 남편이 냉큼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하는거라..
저거 괜찮은 식당이라 돈 좀 나왔을 거거든요.
음식에, 와인에, 커피까지 뭐 다 합치면 시어른들 소비 패턴에는 꽤 거액일텐데...
전 그게 걱정되서요.

인사하고 집에 들어오는데,
남편이 돈 굳었다고 좋아합니다.

아우...아저씨! 우리 아직 부모님하고 밥한끼 먹고 쏠 돈은 있어!!

했더니,

뭐 안써도 되면 좋은거지요. 이런 상황에.
우리가 그간 많이 사드렸는데~~~

아주 표정이 해 맑습니다.
정말 한끼 잘 얻어 먹었다는 표정.
으이구…

나도 공짜 좋아하고 협찬 밝히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난 부모님은 예외 경우로 치는데...
다 큰 아들이 되가지고 말이지, 열이면 열번 다 부모님 식사야 우리가 대접해야 마땅하지,
부모님이야 빚을 지더래도 사드려야 하는거 아닌가, 철딱서니가 없어 철딱서니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본인이 흡족해해서 저도 더 이상은 말 안했는데,
뜬금없이 생각 말미에, 그냥 두 더즌 시켜 먹을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제 가슴 한켠에 파고 들어서 저도 급당황했다는.
역시 우리는 부창부수로구나...

그래서 결론은
어제 이 뉴욕의 백수 부부는 공짜밥 먹어서 행복했습니다...라 이 말씀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