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잘 안 걸리는 감기가 걸려 가지고요.

부부 싸움까지 했어요.

 

 

친정 쪽으로 다들 면역 체계가 어찌나 골골한지, 다들 감기는 예사로 달고들 살아도

저는 어려서 부터 워낙 김치를 밝히고 자라 그런지 감기 웬만하면 안 걸리거든요.

항상 피곤병을 달고는 살아도 감기는 진짜 안 걸리는데.

 

어쩌다 걸려도, 하루나 이틀 아주 심하게 앓고는 뚝! 떨어져요.

 

목요일 밤부터 앓았으니, 금, 토, 이젠 지나갔으리라 믿고

오늘 아침 컨디션은 많이 좋아졌네요.

어제 밤에 아주 푹 잘 잤고요,

지금 티 한 잔 마시고 있는데 거진 정상 컨디션 회복이네요.

 

제가 또 성격이 왕 유치해서, 잘 안 걸리는 감기 어쩌다 걸리면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이참에 관심 좀 확 끌어야 한다고

오만데 전화 걸어서 코맹맹이 소리를 알리는 것으로 시작,

이런 저런 동정표를 받은 것으로 의기양양하게 드러눕는데,

일단 상태가 많이 심해지면 전화질도 여의치가 않은 바,

중간 중간에 상태 좀 웬만할 때 여기 저기다 비상 연락망 식으로 좌르륵 전화를..

 

그래서 어제는 몇 달 동안 연락도 안하던 친구한테 까지 전화했습니다.

 

'어머, 야, 너 목소리 왜 그래?'

 

'어, 나 감기 옴팡 걸렸쓰..콜록 콜록…'

 

저런 식으로요.

 

엄마한테 전화해서는 불쌍한 척을 있는대로 했더니,

뭐 김치를 좀 갖다 줄까, 차가 지금 언니네 가 있는데..

하면서 잘 나가시는가 싶더만, 괜찮다고 걱정 마시라고 했더니, 진짜 안 오시네.

 

사람들이 말이야,

감기 걸렸다고 하면, 그 다음 날 쯤에,

오늘은 좀 어떤지, 차도는 있는지, 팔로우 업 콜이 있어야 할거 아녜요.

어쩜 이리 철저한 무관심인지..

흥, 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 이 말이지!!!

 

 

어제는 이 와중에 또 혼자 주책을 떠니라고,

지금 배추 사와봐야 김치를 담글 컨디션도 아니구만,

집에 김치 떨어졌다고 끌탕을 하면서 꾸역꾸역 동네 야채 가게로

배추 가격 시찰을 나갔다 왔어요.

 

캘리포니아에 닥쳤던 한파로, 파 값이 폭등했다 길래, 배추라고 무사하랴 싶어서 나가봤드만,

음...역시나…평소에 파운드 당 99전 하던거 1불 29전 됬더만요.

우리 동네에서 99전 하면 한국 마켓 가면 보통 49전인데,

한국 마켓서는 79전이나 89전 쯤이 되었겠구나....하는 추론을 마치고,

어쩔 수 없다, 그냥 이번엔 한 병 사다 먹어야겠다, 로 결론을 내리고 집에 다시 들어오니,

 

또 온몸이 쑤시고 으실으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는,

엄마...배추값이 너무 올랐어...이번엔 그냥 한 병 사다 먹을까봐...

이따 폴서방 심부름 보내야겠어..

 

했더니,

 

지하철 안 다닌대요…

한국 마켓을 가자면 우리가 꼭 타야만 하는 노선이 주말 동안 공사한다고 안 다닌다나...

그렇다고 김치 한 병 사오기를 왕복 택시를 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니, 간만에 감기가 걸려서

콩나물국을 끓여서 후루룩 먹을래도 김치가 있어야죠.

딱 이 시점에 김치가 떨어진 것도 약오르는데,

또 요 시점에 배추값이 오르고,

바로 이참에 지하철까지 공사를 하다니,,,,

 

 

재수좋은 과부는 넘어져도 가지 밭에 넘어지고

재수없는 년은 호박밭에 나뒹군다더니,

또 요렇게 딱 삼위일체 재수가 걸려 버렸네…에잇!!!!!!

 

 

그래도 옛날에, 간만에 멋스럽게 하고 출근 좀 해보겠다 하고

새로 드라이 클리닝한 아이보리색 정장입고 나갔다가

집에서 딱 열발짝 뗀 시점에 철길 밑에서 비둘기 집단 방뇨 맡았던 사건에 비하면

덜 재수없다 치고.

그 때는 진짜 너무 약올라서 집에 와서 옷 갈아 입으면서 울었는데..

 

배추값 올랐으면 오른대로 사야죠 뭐.

어차피 다른거 크게 볼 장도 없는데, 딱 김치만 사려고

지하철 타고 나갔다 오는 차비나 시간이나 생각하면

그냥 동네서 파운드 1.29전이라도 한 포기 달랑 사다 담가야 겠네요.

 

마누라는 끙끙 앓으면서, 김치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는데

남편님이란 사람은 옆에서 치킨 숲을 후루룩 후루룩 맛나게 먹으며

풋볼에 하키에 아주 천진난만하게 텔레비젼을 하루 죙일 보시더군요.

 

 

선견지명이 있었던지, 마침 감기 오기 전 날, 친구한테 치킨 숲 만드는 법을 배워 가지고,

한 솥 끓여 놨었거든요.

그런데 또 제가 주댕이가 고급이라, 한 번 먹었던거 그 다음 날 또 먹고 또 먹고를 안해요.

 

머리 속에 맨날 먹는거 생각,

내가 하루에 깨어서 하는 전체 사유의 반이 '뭐 해먹을까' ‘아 이게 먹고 싶다’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하는.

아침 먹으면서 점심 메뉴 생각하고

점심 먹으면서 저녁 메뉴 생각하고

남편하고 같이 저녁 먹으면서 또 다음 날 저녁 메뉴 토의하고.

밤에 자려고 누워서 다음 날 아침 메뉴 생각하고.

 

인생 이렇게 원초적으로 살면 안되는데 말이죠.

혹자는 먹는거에 목숨 거는 사람들 참 한심스럽게 보던데,

다행히 저랑 같이 사는 사람은 귀엽게 봐주더군요.

 

‘하하하, 아니, 지금 먹을걸 입에 넣고 계시면서 다음 번 뭐 먹을게 정말 걱정이 되세요?’

 

하면서.

그렇다고 뭐 요리를 근사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후다닥 뚝딱 해서는 대충 간만 맞추는 식으로 해먹는데,

암튼지 끼니 마다 그 때 그 때 새로 먹고 싶은게 항상 머리 속에 생기기 때문에,

어제 해놓은거 오늘 또 먹고 이런걸 제가 안해요.

 

그러면 그 때 그 때 해먹으면 되지, 어차피 부엌에 들어가 칼잡는 사람 마음인데,

하면 일견 문제가 간단해 보이기도 하는데….저의 문제는,

손이 무작시레 커요.

두 식구 살림에 국이던 찌개던 항상 10인분 하숙집 분량이라,

뭐 하나 했다 하면 여기 저기 돌려서 처리해야 해요.

 

주로 언니들, 간간이 동네도 한 바퀴 돌리고요.

 

작년 여름에 콩국수가 먹고 싶어서

처음으로 해보겠다 하고 여기 저기 검색을 해가지고, 콩을 불렸는데,

분명히 레서피에는 '불린 콩 2컵' 이었는데

제가 콩을 담그기는, 아이 뭐 이걸 나눠서 하고 뭐 구찮아,

이거 뭐 불린다고 얼마나 더 많아지겠어, 하고

한 봉다리 다 싸그리 물에 담그고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음...열두컵도 더 나오더군요.

그 날 불린 콩에 깔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뭏든지 이미 불려놓은거 밀어 부치는 수 밖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들통에 삶고, 믹서에 갈고, 걸러서 엄청난 양의 국수용 국물이랑 비지를 완성해가지고,

우리집 딱 두 번 먹을거만 남기고 무려 네 집을 돌려서 처리 했습니다.

 

 

이 버릇대로, 들통으로 한 솥이나 나온, 치킨 누들 숲을 딱 한 번 먹으니

이제 이건 그만 먹고, 콩나물 국으로 진도를 나가고 싶은데

그게 안되서 그냥 라면 끓여 먹고,

 

남편은 또 저와는 반대로, 먹는 양은 제가 먹는거 반 밖에 안 먹지만,

입에 맞는거 있으면 3일 연속으로도 계속 먹거든요.

닭죽도 3일,

카레도 3일,

김치찌개도 3일,

갈비탕도 3일,

 

저런 것들이 대략 남편이 3일 연속으로 너끈히 먹어대는 메뉴들인데,

이번에 치킨 누들 숲 추가 됬네요.

감기도 안 걸린 멀쩡한 남편이 지금 3일째 계속 데워서 얌냠냠 먹고 있네요.

 

그래서 얄미워서 어제 싸웠어요.

 

워낙에도 고운 심보가 못되는 사람이, 몸살까지 앓으려니 더 심사가 사나워져 가지고,

틈틈히 시비를 걸었더랬죠.

 

나는 당신이 아프면, 다 수발 들어줄 수 있는데,

당신은 아픈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네?

 

나 오늘은 엄마 집에가서 자고 올까봐.

 

이게 환자가 환자다운 대접을 못 받으니 차도가 없네...

 

당신은 죽도 못 끓이잖아.

 

기운이 없으니 큰 소리는 못 내고요,

이불은 세 겹을 덮고, 얼굴만 내놓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모기만한 소리로, 그래도 계속 주댕이를 앵앵앵 놀리며 저리 심통을.

뭐 아픈거야 몸이 아픈거지 입이 아픈건 아니니까 터진 입으로

저런 소리는 끝도 없이 잘 나오더만요.

 

남편으로부터 좀 더 부지런하게 내 수발을 들어줄 것을 맹세받고,

그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받은 다음에는

제가 마음을 좀 풀고,

 

 

바나나 좀 가져와 봐..

 

한 다음에

 

아 이것도 못 먹겠다

 

하고 두 입 먹고 던져 버리고

 

복숭아 캔 좀 따와바...

 

물 좀...

 

하면서 간간이, 아이고, 아이고, 신음도 넣어주고.

 

그래도 예전엔 제가 아프다고 누워 있으면 자기도 아프다고 같이 드러 누웠는데,

그거에 비하면 발전은 발전입니다.

한참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다 집에서 쉬게 된 사람이라,

갑자기 긴장이 풀린 여파로 조만간 몸살을 앓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나 혼자서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생뚱맞게 저 사람이 아닌 집에 내내 편안히 있던 제가 몸살이 난 것도 우습고요.

 

갑자기 발등에 불 떨어져서 일하러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지레 몸이 반응을 하는 것일까?

 

몸살 가지고, 남편한테

실컷 어린양하고 엄살에 앙탈에 암상에 가지가지 다 하고

약 기운에 몽롱해져 오는 가운데 어제 밤 잠자기 전 끝으로 든 생각은,

 

나는 나 하나 몸살 앓기를 이 주접인데,

옛날에 우리가 다 어렸을 때, 엄마가 아팠을 때는 누가 엄마 밥을 해줬을까....?

엄마는 이렇게 아팠을 때도, 누웠다 일어나서 우리 밥을 해줬던 걸까?

 

밥 먹고 사는 문제부터 해서

나는 나 하나 추스리는 인생도 버겁다고

맨날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에, 한숨에, 좌절에, 갖은 폼만 다잡고 사는데

 

나의 어머니는

지금의 내 나이에

막둥이가 두 살 배기인 올망졸망한 다섯 아이의 어머니였다니...

아우 머리야.

 

용감한 어머니의 이 나약한 딸이라니.

 

내 안의 어디엔가 조금이나마 라도 유전으로 물려졌을

그녀의 생활력과 인내와 투혼의 의지를 일깨워 보겠다는 다짐을 아주 잠깐 하기는 했는데..

사람이 감기 몸살 한 번 앓고 개과천선 하기는 좀 무리고,

일단, 맛난 것부터 좀 찾아 먹으면서 기운 더 차리고,

어차피 오늘은 또 일요일이니, 오늘까지 쉬고 내일부텀 고민해 볼랍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단,

배추 사러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