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녹은 겨울산에서 생긴 일

날이 푹해서 나온 이웃동네 산책길은 종종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보곤 했던 황톳길이었다. 뼈대를 드러낸 겨울나무 사이로 구불구불 발그레한 오솔길은 멋스럽지만 발 밑은 어릴 때 미술시간에 가지고 놀던 찰흙이 디룩디룩 깔려 있는 형상이었다. 손으로 주물주물 하면 착착 달라붙던 질감 끝에 손바닥엔 붉은 물이 들던 옛추억을 떠올리니 새삼 운동화가 하얗게 보였다. 산책말이야, 할까 말까…

오솔길 가장자리에 다소곳이 쌓인 낙엽 위로 살살 피해가면 되겠다는 유혹이 내친 발걸음을 꼬드겼다. 길은 모퉁이를 돌아 오르면 오를수록 푹신거렸다. 발이 푹푹 빠지는 것이 이젠 뻘밭이었다. 지난 며칠동안 쌓였던 눈이 햇살에 녹은 끝이라 더 눅진해진 모양이다. 예상과는 다르게 신발은 찰흙과 나뭇잎이 함께 들러붙어서 점점 묵직 해졌다. 흙이 모태로 되돌아가기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한발 한발 힘 있게 내디뎠지만 내 하얀 운동화는 찐득하고 퉁퉁한 덧신을 신고 신발만은 거인의 것처럼 몸집이 커져 붉은 빛으로 물들 뿐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적 방식으로는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아서 미안하지만 나무에 대고 발을 탕탕 털었다. 고요한 산책길은 퉁퉁 소리를 반사하나 신발의 찰흙은 떨어지지 않았다. 찰흙이 왜 찰흙밭으로 돌아가지 않고 신발에 붙어있는지 이해하고 남을 지경이었다!!

이번엔 나무 기둥에 신발 모서리를 대고 뒤에서 앞으로 밀었다. 옆구리에 붙어있던 찰흙은 마찰에 못 이겨 떨어져 나갔지만 위쪽으로 밀려 올라온 놈도 있어서, 붉은 덧신은 얇아졌으나 깊어진 꼴이 되었다. 옆쪽 헝겊부분의 날실과 씨실 사이로 찰흙이 붉게 파고들었다.

망했다. 이제 자연제거는 불가능 해졌고 영락없이 세탁하는 수 밖엔 없겠다. 게으른 마음이 허탈해서 비실비실 웃었다.

멀리서도 탕탕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뒤에서 오던 여인은 “얌전하게 걸으시네요. 저는 바지에 다 튀었어요.” 라며 내 앞에서 자신의 뒤 태를 훑었다. 여인의 검은 바지엔 붉은 반점이 어지럽게 들러붙어 있었다. 그녀도 나도 겨울날, 이 무슨 이벤트냐며 웃었다.

어차피 망한 거, 텀벙텀벙 걸었다. 모퉁이를 돌자 숲길을 울리던 탕탕 소리가 눈앞에서 펼쳐졌다. 할아버지 한 분이 울타리에 몸을 의지한 채 벗은 신발을 나무울타리에 대고 탕탕 털고 계셨다. 놀란 새들이 푸드득,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녔다. 고요한 숲길에서 난동을 부리는 우리네를 원망하 듯 째지는 음색으로 울었다.

눈 녹은 산책길엔 새들의 아우성과 신발 탕탕 소리와 철벅대는 발소리와 나무 둥치에 찰흙 부비는 소리와 튕겨진 진흙방울이 바지에 들러붙는 소리가 뒤섞여서 겨울산은 발그레하고 따땃하고 휘영청 어수선하고 어지러웠다. 아, 이 유별한 겨울산…

사실은 사서 한 고생일 수도 있지만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살아있는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