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딸이 있다네

하늘은 짱짱했고 천안아산역 플랫폼에는 기차를 타기위해 늘어선 긴 줄이 있었다. 막 7시가 된 시각,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나 멀쩡한 얼굴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졸린 눈에 하품이 고인 입… 나는 사람들의 일상이 참 생기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품을 훔치거나 막내와 손장난을 치거나 낯선 아침 광경을 흘긋거리며 기차를 기다린다.

언제부턴가 아침에 바삐 일어나 갈 곳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일었다. 그러면 눈을 떴을 때 심장 한가운데가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비어가는 느낌 따위를 찬찬히 안 바라봐도 될 것이다... 바쁘면 맑은 지 흐린 지도 모른다던데, 날씨에 민감해진 ‘나’가 우산을 챙겨야 하는 지 겉옷을 챙겨야 하는 지를 넘어 생애 자체의 무게가 날별로 달라지는 현상을 겪는 건 늘어진 시간 탓이 클 것이다. 일하면서 바쁘게 살면 보수가 따르지만 백수가 바쁘면 비용이 든다는 사실은 슬픈 현실이다. 쓸데 없이는 말고 오늘처럼 새벽부터 헐레벌떡 사지를 움직이는 필수 이벤트가 그래서 반갑다. 콧노래가 나온다.

막내와 나는 미국대사관으로 향한다. 막내는 이중국적의 신분이라 한국여권으로 한국에 입국하고 미국여권으로 미국에 입국한다. 그런데 미국여권의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갱신을 해야 한다. 6~8주 걸린다는데 빠르면 4주면 나오고 택배로 받을 수 있다.

서울역은 늘 번잡해서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 이른 시각이 무색하도록 꽉 찬 대합실, 바쁘게 걸어가는 발들,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노조원들, 줄 지은 버스, 광화문에서는 이미 정부비판의 데모가 시작되고 청원경찰의 방패막은 버스 밑둥치에 놓였다. 저 무거운 것을 들고 서 있어야 하는 사람들은 늘 젊은이지만 내 또래의 젊은이였다가 이제 자식 또래의 젊은이로 바뀌었다. 젊음은 그렇게 쉽게 왔다가 간다. 오, 놀라워라, 그 세월동안 변한 것 없는 미대사관의 모습이란… 1999년 비자를 받기 위해 새벽부터 서성였던 그 공간에 그때 세상에 없던 스무살의 막내가 와있는데 미국대사관의 모습은 그대로다!

얄짤없어 보이는 그들의 태도도 그대로다. 규칙을 모르고 아이패드를 들고 온 막내는 온 길로 돌아가 지하철 사물함에 아이패드를 맡기고 다시 와야 했다. 그런 띨띨한 사람을 위해 조금 큰 바구니를 준비해서 잠시만 맡아주면 안 되는가? 인간다움을(실수하는 인간) 배려하지 않는 행정을 비판하는 나와는 달리 막내는 규칙을 몰랐던 건 본인의 잘못이라고 쿨하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세대차이인가, 문화차이인가, 사람차이인가!

일이 끝나고도 아직은 이른 시간, 광화문에는 교보문고가 있으니 그곳부터 투어를 한다. 난 교보문고가 참 좋다. 장수했으면 좋겠다. 특히 긴 테이블이 나라나란히 놓여있는 스폿이 좋다. 그곳에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가 있다. 기분이 좋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점심을 먹기위해 막내가 찾아 놓은 미슐랭 맛집을 찾아간다. 이번엔 광장시장 안에 있는 육회집이다. 아버지가 좋아해서 엄마가 자주 만들던 육회를 먹고 자란 나야, 입에 침이 고이지만 막내는 어찌 육회가 먹고 싶을까??? 육회 골목엔 유독 그 집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지만 다른 집들도 맛있다는 평이다. 맛있는 밥은 인간의 영혼을 살찌우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광장시장에서 나와 동대문시장까지 가볍게 걸어간다. 애용하는 제일평화시장은 고퀄리티의 옷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몇 줄로 다닥다닥 늘어선 가게를 돌다 보면 어느새 같은 지점으로 돌아와 있어서 전체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내 생애엔 없을 듯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선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한다. 득템을 하면 또 콧노래가 나온다.

그런데… 

가끔 이곳저곳에서 내 또래 모녀사이가 보이면 물끄러미 쳐다보곤 하는데, 나도 딸이 있는데… 하면서 말이다, 이국만리 떨어져 사는 서글픔을 찔끔 맛보면서... 그러니 사실 오늘은 교보문고에 가서라기 보다, 맛있는 걸 먹어서라기 보다, 가성비 좋은 옷을 사서라기 보다, 딸이랑 함께라서 콧노래가 나오는 걸 지 모른다! 꼭두새벽 기차역에서 콧노래가 나온 것도 사실은...^^ 그래 내게도 딸이 있다네!!! 함께 낄낄대거나 투닥댈 수 있는...

요새 한국 젊은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를 안 가지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다 합쳐도 주고받는 '사랑' 하나면 보상이 되고도 남을 관계인데... 너무 세속적인 계산만 하는 건 아닌지... 미운정 고운정이 합해져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영구히 존재하는 '자식'은 일부러 놓치기엔 큰 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