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에서 맞이한 할로윈
잘츠부르크행 기차를 탄 이유는 시차 때문이었다. 새벽 4시에 눈이 떠졌고 몸이 피곤해서 걷기보다 기차를 타고 찬찬히 창밖을 보면서 편하게 오스트리아를 느껴보면 어떨까
했다. 마리를 만난 건 그 덕분이었다. 비엔나에 도착하자마자
또 기차를 탔냐며 자신 같으면 3일은 뻗어있을 거라고 농담을 하던 마리는 희수 77세였고 몇 년 만에 친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마리는 모국어인 독어만큼 영어가 유창했다.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서로 끌리는 걸 어쩌지 못했다. 지적이고 허심탄회하고 생각이 깊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 계획과는 다른 시간이 흘러갔지만 모짜르트와 음악도시, 비엔나 커피
정도만 알고있던 비엔나에 대해 어렴풋한 윤곽을 배우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9개 주로 나뉜 연방 국가로서 각 주에는 주도가 있으며 그중 비엔나, 잘츠부르크, 그라츠를 마리는 추천했다. 일주일 정도라면 비엔나만 봐도 볼거리가 충분할 거라 했다.
비엔나는 링(말발굽 형태의 중심도시)안의 도시와, 외곽에 제 2부터 제 23구역까지 도시가 차례로 생겨나 현재 모습이 되었다. 트램을
타거나 걸으면서 박물관과 중세 건축물을 구경하면 되는데 백 여 개의 박물관이 있고 국립미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벨베데레(클림트 작품 소장)는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수백
년 동안 찬란히 건재하는 바로크와 고딕, 로코코, 클래식 양식의 건축물로 들어찬 링 안에 서면 마리는 절로 마음이
경건해진다고 했다. 모짜르트와 요한 스트라우스, 괴테와 프로이트를
잉태한 나라… 또 히틀러와 스탈린이 동시대에 머물던 나라…
이런저런 비엔나에 대한 정보만 들었다면 핵심을 전하는 그녀의 지식과 언변에 감탄을 하고, 헤어질 땐 한 오스트리아인의 친절에 감사를 전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2시간 반 동안 마리의 생에서
굵직하게 일어난 사건을 함께 알게 되자 나는 특별한 감정이 생겼다.
기차에서 처음 만난, 눈동자 색깔이 다른, 세대마저 어린 내게 그녀는 처음부터 마음을 열어 진실을 말했으며, 돈과 기차표와 휴대폰이 든 가방을 맡기고
화장실에 다녀왔으며, 가슴 아픈 개인사와 현재의 상황까지 조곤조곤 풀어놓았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신뢰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상대를 꿰뚫어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신뢰는 특별히 아름다운 감정이며 그것만큼 관계를 밀접하게 만드는 수단이 없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마리의 신뢰를 받아들였고 잠을 설친 마리의 목과 어깨를 주물러주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며, 7분안에
기차를 갈아타야 해서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고, 2년 후 남편의 안식년때 유럽에서 살게 되면 또 만나자는 약속마저 했다. 그녀는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었고 나는 크리스마스때 이메일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고백컨데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안아주고 싶었다. 아마도 6년 전, 42세인 아들이 죽었을 때 자신의 심장도 같이 죽어버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생겨난 마음인 것 같다. 그래, 그러고도 남을 일인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보낸 참사는…
자식이 둘이나 있어서 나는 마리의 심장을 알고도 남는가? 가슴이 먹먹해져서
할말이 사라지는 현상은 자식이 있어서 생긴 슬픔인가? 1년 전 이태원에서 자식 잃은 수많은 부모의 마음을
외면하는 한국의 대통령은 그러고 보니 자식이 없다. 그래서 대통령이 그들의 초대를 나몰라라 하는 걸지도… 오늘은 마리를 만난지 나흘째 되는 날이자 할로윈. 하필 호텔이 놀이공원역에 있어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너른 광장이라 북적여도 이태원참사와 같은
비극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아 다행이었다.
지금, 호텔 라운지에서 퍼지는 음악소리가 쉼 없이 방벽을 쳐대고 빈의
하늘은 불꽃놀이 축포로 시뻘겋다. 할로윈이 이토록 흥겨운 날이었던가. 전에도 잘 몰랐지만 앞으로도 모를 일이 되었다. 자식을 잃고 심장이
죽은 마리와, 삶이 사라진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부모님들이 거듭 생각나는 밤이다. 그들께 진심을 다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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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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