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언니가 혼자인 이유

내가 중학생때까지 죽고 못사는? 사촌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우리 사이를 어떻게 정의할지 모르나 나는 그랬다.

자라면서 늘 생애 아쉬움이 있었다면 언니나 여동생의 부재였다. 어렸을 때, 엄마가 세번째 아기를 유산시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안타깝다 못해 분하기까지 했으니… 남동생 밑으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던 태아가 여동생이란 보장도 없는데 나는 유산의 의미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한 채 엄청난 보물을 놓친 마음이었다. 그러면서도 부모님을 원망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 국가가 내 건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라는 구호가 법령 같은 위엄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 옆집도 뒷집도, 내 친구들의 형제자매도 웬만하면 둘이었다.

한 집에서 모든 걸 공유하며 어떨 땐 맞먹을 수 있는 친언니는 아니지만 사촌언니는 아쉬운 대로 내게 언니가 있는 삶을 맛보게 했다. 같이 떡볶이 먹으러 다니고, 밤 늦게까지 공기놀이를 하고, 한 이불에서 자며 수다 떨고, 하기 싫은 청소도 함께 하면 놀이가 되고, 바비인형을 물려받고…

네 살 터울인 언니가 자꾸 대학에 떨어져 수험기간이 길어지는 동안 나도 수험생이 되고… 만남은 드물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좋아하고 의지하면서 대학생이 된 후엔 함께 여행을 하고 언니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같은 과 남자들에 관한 수다를 들었다. 그 중 하나와 결혼해서 임신을 한 언니에게 어느 날 물었다. “박력 있고 야망이 큰 남자랑 자상하고 성실해 보이는 남자 중 어떤 사람이 결혼상대로 좋을까?” 언니는 명료했다. “결혼생활에 박력 같은 건 필요 없어”

이후 나는 자상하고 성실해 보이는 남자를 사귀어 결혼해서 임신을 한 후엔 언니로부터 결혼생활과 임신에 관한 쏠쏠한 지혜를 얻었다. 그러다가 집안에 커다란 사건을 맞이하여 우리는 원수처럼 동떨어지게 되었다. 큰삼촌, 즉 언니의 아버지가 바람 피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큰삼촌댁에 사시던 할머니는 이성 없이 아들편을 들었고 그로 인해 성이 난 사촌오빠가 무람없이 할머니를 대해 엄마를 비롯한 두 이모가 불같이 성을 냈고 그런 세자매를 원망하는 언니에게 나는 화를 내며 울 엄마 편을 들었다. 생각해보니 이건 뭐 동물농장이었다. 이성은 오간데 없는 본능의 향연.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누구의 편을 드는 행위를 결코 거룩하거나 인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성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답지. 그런 내가 그랬던 걸 보면 남자들 외도가 범사인 시대를 사신 할머니 입장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할머니는 그러지 마셔야 했고 나 역시 그러지 말아야 했다.

어쨌거나 우리가 그렇게 콩가루 집안은 아닌데, 전무후무한 회오리바람이 온 집안을 들쑤셨고 관계가 위태로이 흔들리면서 일부 친인척간 왕래가 끊겼다. 회오리에 바스러진 집채가 다 수리되기 전에, 나는 남편을 따라 도미를 했고 장거리 통화는 1분마다 거금이 들어가므로 전보처럼 용건만 주고받던 시절에 언니한테 연락할 생각을 못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날, 형부가 의료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니는 형부를 따라가려다 실패한 후 소송을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와 언니를 만나고 싶었지만 법정 다툼으로 삶이 피폐해진 언니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몇 번 시도를 했지만 여전했고 언니는 아예 내가 안중에 없는 듯 했다. 처음엔 이해했지만 점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내 안에 숨어 지내던 못되먹은 내가 속닥였다. 그래 맞아, 언니는 원래 까탈스러웠어. 지 성질 급한 건 생각도 못하고 나보고 굼벵이라 놀렸지. 또 얼마나 깔끔은 떨었게, 맨날 청소해대면서 나보러 닦으라 하고, 물 마신 컵을 옆에 놓으면 꼭 부엌에 갔다두라 하고, 닦아 놓은 싱크대에서 손 씻는다고 성질 내고… 또 뭐였더라? 언니가 나한테 잘못한 게 뭐였지?? 나는 나쁜 기억을 떠올려 언니를 내 맘에서 몰아내려 노력했지만 더 이상의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남편 직장선배 중 한 분이 상처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변고였다. 얼마나 마음이 허황하실까… 처음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다가 슬며시 꼬리를 무는 생각이 있었으니 언니였다. 형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더라? 나는 그때부터 은연중 두 사람을 연결시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남편에게 소개팅을 주선하자고 말했다. 언젠가 좋은 기회를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선배님이 상처하신지 4년이 되는 이 늦가을을 맞았다.

혼자가 좋은 건, 숫자 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가 행복해서 삶을 방해받고 싶지 않거나, 혹은 둘을 경험해 봤지만 사랑과 안온 보다는 갈등과 불화가 더 축적됐기에 다시는 둘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케이스가 아니었다. 예상대로 선배님은 기껍게 소개팅을 원하셨다. 이후 나는 언니를 종용했다. 언니는 12년 동안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라 혼란스러워 했지만 단번에 거부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인연은 하늘과 땅이 움직여 만드는 것이기에 내가 할 일이야 별 것 없겠지만 나는 언니가 한번 더 좋은 인연을 만나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한나절 고민 끝에 언니가 말했다. 연아야,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92세에 거동도 불편한 울 엄마가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실까 싶은데 지금은 엄마한테 집중할 시간이란 생각이 들어… 외숙모를 모시고 사는 언니는 자신이 사는 이유가 외숙모 때문이라고 했다. 조카가 들으면 서운하겠다니 그게 진실인걸… 한다. 아침에 자고 일어났는데 외숙모 방문 안에서 기척이 들리지 않으면 언니는 방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게 된다고… 그랬지, 언니는 어릴 때부터 외숙모를 깊이 사랑했다. 외숙모를 사랑해서인지 아무 노인을 보면 뭐라도 해드려야 한단다.

나는 더 이상 언니를 종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언니를 왜 그리 좋아했는지… 언니는 그럴만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