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가 독립해도 부모가 지켜줄 것 중 하나

1990년대 흔한 풍습대로 나는 결혼 전까지 부모님 집에서 함께 살았다. 실제로는 부모님의 집이지만 나는 내 집이라고 생각했다. 결혼 후, 내 집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곳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을 때 그래서 저으기 당혹했다. 엄마는 내 침대를, 책상을, 옷장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후 내 방은 알맹이가 빠져나간 거푸집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이해는 간다. 울 엄마는 남한테 퍼주기 좋아하는 성정이고 나도 엄마 닮아서 실용주의를 애정하므로… 게다가 엄마는 내가 남편과 살기 시작한 신혼집에 새침대와 옷장을 비롯해 온갖 살림살이를 넣어주었으니까, 시집간 그곳을 이제 너의 집으로 여겨라, 말씀하셨으니까. 어쩌면 그런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친정이라고 불러야 할 곳을 여전히 내 집이라 생각한 것이 실수였을 지 모르겠다. 신혼집이 친정과 가까워서 잘 필요는 없었지만 가끔씩 휑뎅그레해진 내 방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그리고 은연중 허전과 불편과 서운함을 느꼈다. 1년즈음 뒤엔 남동생이 결혼해 올케가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 내 방은 아예 동생내외의 옷방이 되 버렸다. 그때 알았다. 내 방이 없는 내 집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신혼 초, 시집에는 남편의 방이 보존돼 있었다. 남편의 방은 내 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댁내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이 되어주었다. 남편의 방에 머물며 이런저런 옛 물건을 살피다 보면 재미난 이야기들이 튀어나왔다. 그곳에 누워 책을 읽을 때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엄마가 말한 ‘시집간 그곳’은 시댁을 의미했는데 며느리는 결코 딸이 될 수 없다는 시어머니의 지론 하에 절대 내 집이 될 수 없는 곳임에도 남편의 방은 작은 안식처로 존재했다. 두 아들이 결혼해 독립을 하자 시집은 딱 두 분이 지내실 만한 공간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엔 남편의 방이 없었고 규모상 있을 수도 없었다. 내가 쓰던 물건들이 없어진 집은 남편에게도 더 이상 내 집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딸들과 미래 딸들의 가족이 머물기에 편안한 집과 방을 오랫동안 보존해야지, 다짐했다. 쓰던 가구를 불가피하게 없앤다면 그 전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마련해 놓을 참이다. 그런데 이번에 막내가 울었다. 이번 겨울에 딸들이 다녀갔는데 막내가 울었다.

새로 이사 온 집은 방 하나를 터서 거실을 넓게 만든 구조라 남은 방이 두 개인데 싱글 침대와 책상과 붙박이 장이 든 작은 방을 먼저 온 큰애가 사용하기 시작했다. 큰애는 열 흘 가량 머물다 가므로 막내가 일주일 정도만 참으면 나머지 3주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겠다는 계산을 했다. 결국 얕은 셈법이었다. 사실 막내는 평소 우리 침대에서 자기도 하고 장난스럽게 매트리스를 끌고 와서 우리 침대 옆에 두고 잠을 자기도 했기에, 이번에 막내의 매트리스를 안방에 두면서 작은 방에서 언니랑 함께 지내도 되는 플렉서블한 환경을 제공했다. 원체 언니뿐 아니라 엄마아빠한테도 양보를 잘 하는 막내라 괜챦겠지 싶었는데 일년만에 와서 짧게 머물다 가는 큰애에게 맞춰진 모든 일정과 대우가 자칫 막내의 감정선을 건드린 모양이다. 언니랑 죽고 못살게 사이가 좋아도 서운한 건 서운한 게다. 막내는 언니 가는 날, 사소한 불만이 도화선이 되어 울고 말았다. 그때서야 나는 참기만 했던 막내의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생각해보면 저도 미국서 몇 개월만에 집에 왔고, 새로 이사 온 집이 낯선데 자기 물건이 든 방을 언니가 사용하고, 좁아서 함께 쓰지도 못하고, 제가 있다가 양보를 하는 자의적 베풂과 아예 와보니 하나 있는 방이 언니 차지가 된 것은 분명 다른 상황일 터였다.

나는 깊이 반성했다. 이후 3주 동안 내 마음의 더 없는 보물로서 막내를 마주했더니 다행히 서운함을 풀고 어제 떠났다.

그리고, 혹여라도 내 경험이 독자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녀가 독립해도 부모가 지켜줄 것 중 하나는 자녀들이 돌아와 머무는 짧은 시간동안 그곳이 제 집임을 느끼게 해줄 제 방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