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진짜 성공한 사람…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엔 평온이 있었다. 황톳빛 논들이 머리를 짧게 깎고 따스한 햇살 아래 드러누웠다. 고된 하루를 마감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건실한 마당쇠 같기도, 이른 동면에 들어간 누런 곰 같기도 했다. 겨울동안 까까머리 들녘은 달콤한 꿈도 꾸고 온 몸으로 눈을 먹고 배를 퉁퉁 두드리며 피로와 허기를 풀 것이다. 그렇게 다시 생생해진 몸으로 여름판을 벌리면 씨나락을 피워올린 벼포기들이 하늘거리며 기지개를 펴겠지… 그 따스한 생의 희열을 꿈꾸며 늦가을 들녘은 피곤한 몸을 녹이는 것 같았다.

라디오에서 말했다.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되지요? 라는 질문에 학생들이 모두 물이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만이 봄이요,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발상의 전환이 우리의 미래를 밝게 해줄거라는 메시지였는데 내 마음에서는 그 대답을 한 학생의 바람(hope)이 환하게 빛이 났다. 차갑고 딱딱한 겨울이 녹으면 몰랑몰랑한 봄이 올 거라는 생의 희망을 알면서도 간과하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 앞에서 그 아이는 해주지 않았던가, 민들레도 들려주고 개나리도 말해주고 강남갔다 돌아오는 제비도 물고 오는 봄 이야기를… 무언가를 바라볼 적에 누군가 쳐둔 금 안의 작고 어둡고 딱딱한 것에만 시선을 머물지 않는 파격, 파릇한 생각과 넓고 유들유들한 사고로의 전환이 우리네 인생을 풍요롭고 평온하게 만들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나는 고속버스 창 속에서 휙휙 변환하는 시골 풍경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아파트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주 한옥마을과 최명희(혼불의 작가) 문학관을 체험하러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는 옳타구나, 신청을 했다. 문학기행같은 거, 얼마나 해보고 싶었던가. 기회가 왔으니 당연히 다녀와야겠지,하면서… 그런데 가겠다고 했을 때는 언제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려니 11월 중순밖에 안 되었고만 입에선 허연 입김이 염치없는 놈의 손바닥처럼 뻔뻔하게 피어오르고 딸아이가 등교도 하기 전에 마실가는 행위가 괜시리 열쩍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엄마, 바이’

오랫동안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는 막내의 목소리를 삼켜버린 엘리베이터 안에서 대체 무슨 대단한 구경을 하겠다고… 남편도 출장가고 없는데… 란 자조가 새어나왔다. 사실 내게 이런 여행은 낯설다. 딸들은 내 꼬리표였고 우리 가족은 한 덩어리였다. 아이들과 남편 없이 나 혼자 여행하는 일은 지난 17년 세월에는 없었던 일이다. 문득 노인회다, 복지관이다 해서 홀로 단체구경에 열심히 참가하시는 엄마가 떠올랐다. 미국에서 살 적에는 ‘아버지랑 같이 가시지…’라며 사뭇 못마땅한 마음이 컸는데 이젠 내가 홀홀 단신 그런 여행을 한다. 품 안의 자식도 떠나고 남편은 바쁘니 친구를 찾게 된다는 그 중년이 되었으니… 맞다… 마흔 다섯이면 그럴 나이다... 문득 입가에 작고 어설픈 미소 하나가 떠올랐다.

관광버스 옆자리에는 나보다 서너살 적은 동네 여인이 타고 있었다. 한국에 와 일단 아파트내 봉사부터 시작하자는 마음에 부녀회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유독 낯을 가리는 그 여인과는 별로 말을 섞어보지 않았건만 오늘 짝꿍이 되었다. 나는 그 여인과 무슨 말을 할까 궁리하다가 어떻게 애들 둘 키우면서 냅킨 아트, 북book 아트, 도서관 봉사, 부녀회… 등등 그렇게 많은 일을 해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뭐든 하고 싶어요. 그냥 이렇게 엄마와 아내 노릇만 하다가 생을 마치고 싶진 않아요,라며 수줍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시골출신인 그녀는 위로 다섯 오빠가 모두 공부에 출중해서 서울로 가는 바람에 혼자 시골집에서 자랐는데 함께 살던 조부모님과 부모님으로부터 공부는 해서 뭐하냐, 나가 놀아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다고 했다. 공부를 매우 잘 했던 오빠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었건만 대학 졸업후 사회생활 한번 안 해보고 결혼한 자신은 지난 세월이 무척 후회가 된다고 했다. 이제라도 무엇이든 배워서 자격증도 따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것이 그녀의 희망이지만 무엇을 해야할 지 아직 모르겠다는 것이다. 진작에 한 길을 정해 걸어왔다면 지금쯤 무어라도 되었을텐데… 나이 마흔에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한심하고… 너무 늦어서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란 생각도 들고…

그때 창 밖에는 추수를 끝낸 논들녘이 환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문득 우리네 인생도 저 들녘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농본기와 추수철이 있으면 겨울철 휴지기도 있는 것. 생을 살다보면 봄처럼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늦가을처럼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허나 일년 사계절을 모아보면 다들 차는 시기도 있고 기우는 시기도 있기는 마찬가지… 사실은 나도 무엇이든 일찍 시작하는 것이 더 높이 쌓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토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 딸들에게는 그 길이 일찌감치 열릴 수 있도록 돕고 독려하는 것을 내 일이라 여기고 살아왔다. 하지만 어떻게 모든 사람이 한 선에서 동시에 출발할 수 있을까. 각자 재주도 다르고 철드는 시기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그릇을 채우려는 노력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기업을 세워 백만장자가 된 사람의 인생이 한 건실한 농부의 삶보다 더 훌륭하고 성공적이라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족과 행복인 것이다. 그건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고유 감성이다. 남들은 허상을 볼 뿐... 창 밖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나는 그녀에게 성공적인 삶에대한 내 개똥철학을 살짝 털어놓았다.

‘인생 진짜 성공한 사람은 누군지 알아요? 죽을 때 웃으면서 떠날 수 있는 사람이예요. 그러니 다 살아봐야 알지요. 아직 반절이나 남은 여생... 열심히 살자구요, 우리…’

잠시 후 나는 그녀에게서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오는 순리같은 미소를 보았다. 늦가을 들녘처럼 평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