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한국 적응기
이 해도 간다. 2013년… 우리 가족에게는 대단하게 분주하고 변화무쌍했던 계사년… 검은 뱀이 허물을 벗고 새 몸피를 입은 것처럼 우리 가족도 새로운 환경에서 안주를 꿈꾸기 시작한 2013년… 이여, 이제 안녕!
미국시민권자인 두 딸은 영어에 열광을 하나 영어로는 잘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진정 고군분투했다. 초등생 작은 딸은 학년 평균 88점인 학교에서(어찌 이런 학교가 있는가?) 45점을 맞는 쾌거를 이루었고 큰 딸은 성적표를 보여주지도 않지만 굳이 볼 필요는 없는 기록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1년새 극상반된 학업행보를 이룬 딸들에게 우리 부부는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응원의 말을 외칠 뿐이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전교 꼴등을 해보겠느냐? 사람이 살면서 일등도 해보고 꼴등도 해보니 이 일은 길고도 짧은 인생에서 반드시 의미가 있을 것이며 언젠간 이 경험으로인해 도움 받을 날이 꼭 올 것이다!!
학업적인 단면으로는 앞으로 추이를 지켜보아야 하겠지만(적어도 한국말은 엄청 늘었다^^) 이 대단한 변환사에 있어 딸들이 이루어낸 한가지 성과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두 아이 모두 한국 생활에 있어 안정궤도에 들어선 사실 말이다.
큰 아이는 학업은 물론이요 인성교육을 중시하는 일반 학교로 편입하여 스스로 야간자습까지 선택해서 행하는 무늬가 완벽한 한국 고등생이 되었다. 베스트 프렌드들도 생겨서 집에도 오고 친구들끼리 떡볶기나 닭갈비도 사먹고 크리스마스 선물도 교환하며 살고 있으니 엄마지만 그 적응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1년을 시험기간으로 삼고 아이를 살펴보다가 정 한국생활을 버거워하면 미국으로 보낼 생각을 했건만 그 옵션은 이제 무색해졌다. 물론 전혀 불온한 헤프닝이 없었던 바는 아니다. 몇몇 짓궂은 학우들로부터 한국책을 유창하게 못 읽는다는 비꼬임도 듣고 가방에서 물건도 없어지고 한 학과선생님께 시험을 어찌 그리 못 보았냐는 퉁박도 들었다. 그런 일이 있을 적에는 학교에서 혀를 빼물고 참았던 울음을 집에 와서 터뜨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겉으론 좋은 해석으로 에둘러 주었지만 속으로는 미국행이란 옵션을 더듬어 확인해 두는 일을 잊지 않았다. 눈물콧물 흘리며 작별을 아쉬워했던 미국의 남자친구로부터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갈 것을 통보받았을 적에는 좋은 공부를 한 셈이니 이를 본보기 삼아 변치않는 남자를 잘 살펴 만나라고 조언을 하면서도 그런 일이 한국행을 고집한 엄마로인해 벌어진 불상사임을 돌이켜보면 한없이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울음끝이 짧은 아이는 금새 털고 일어났고 영어재능기부 봉사도 하고 플륫도 꾸준히 불고 야간자습도 하면서 꿋꿋하게 앞으로 걸어가는 중이다.
한국행을 결정할 때 나는 아이들 자질중 크게 두 가지를 믿고 일을 추진했다. 하나는 환경 적응력이었다. 딸들은 친구들을 좋아하고 어디서든 잘 어울리는 원만한 성격을 가진 편이다. 집에서는 한국말을 썼기에 일상의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평시에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국에 가서도 친근함을 느끼고 잘 지낼 것이란 기대를 품었다. 또 하나는 성실성이었다. 성실한 편이므로 학교를 안 가겠다고 떼를 쓰지는 않을 것이고 공부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허나 예상은 예상일 뿐 기대 반, 불안 반은 항상 공존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 같다.
큰 아이같은 경우는 감사하게도 한 달이 안 되어 안정기에 들어섰지만 그것이 꼭 아이가 잘해서 이루어진 일만은 아니란 생각이다. 일단 학교에서 받는 혜택이 컸다. 나는 미국에 있을 때 한국의 수많은 학교와 교육청에 문의를 한 후 신중하게 몇몇 학교를 정했고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그곳들을 방문했다. 그런데 지금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에는 남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천주교 재단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한없이 순하고 착해 보였다. 그 아이들을 대하는 순간 내 마음에서는 꼭 이 학교에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편입상담을 해주시는 선생님의 반응도 달랐다. 미국에서는 공부를 잘 했다지만 한국어가 서툴기 때문에 국제학교가 아닌 일반고(특목고 포함)에서는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학업을 따라갈 일이 요원해 보이는 현실때문에 이래저래 저울질하는 눈치가 확연했다.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이 학생이 자교를 어떻게 빛내줄 것인가에 촛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는 딸아이의 행복과 학교생활만족에 촛점을 맞추어 대화가 진행되었다. 일류대학에 몇 명이 들어가는가에 혈안이 되는 한국 고교의 실정을 뛰어넘는 진정한 교육철학이 엿보이는 장이었다. 딸아이는 행운이었다. 어떤 학교에 들어갔느냐에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 한국말 잘 못 하니까 미국 가서 살라는 말까지 들으면서 버텨온 아린이는 어느 시점부터 왠만큼 적응한 듯 보였는데 방학이 시작된 어제는 정말 놀라운 말을 했다. “엄마, 4학년이 끝나는 게 너무 아쉬워요. 계속 4학년에 있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 말의 진의가 헤아려지지 않아 더이상 나이를 먹고싶어하지 않는 피터팬 증후군을 떠올리면서 왜?하고 반문을 했다. 그러자 선생님도 너무 좋고 학교도 재밌고 친구들도 좋아요,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왜? 어쩌다가? 언제부터?... 나는 말문을 잇지 못하고 살짜기 불거지는 눈시울때문에 심호흡만 들이켰다. 하나님께, 아린이 담임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울컥거리며 솟았다. 사실은 아린이가 전학했을 때 하필 기간제 선생님께서 새로 부임해 오셨는데 선생님이나 아린이나 환경이 낯선 것은 마찬가지여서 별로 배려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영어에 문외한이신 선생님은 아린이에게 그저 한국어로 쓰기를 권하셨다. 그러다가 육아휴가를 마치고 담임선생님께서 복귀하셨는데, 이후부터 아린이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선생님께서는 아린이뿐 아니라 엄마인 나까지 배려하실정도로 생각이 깊으시고 아이들의 인성교육에 특별히 신경을 쓰셨다. 특히 친구들과 시험점수 교환하지 않기란 원칙을 내세울만큼 앞선 교육관을 지니셨다. 그런 선생님의 임재로 반 분위기가 달라졌고 그래서 아린이는 안정궤도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된 것만으로 아이들이 큰 성공을 이루었다 말한다면 너무 소시민적 감상일라나? 하지만 그래도 좋다.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게 된 2013년이라 감사한다. 주변의 염려와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한다. 삭막해 보이기만 한 한국의 현실 속에서 네잎 클로버처럼 행운이 건재함을 발견해 감사한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이 인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감사한다. 이렇게 감사하며 계사년을 보낼 수 있어서 다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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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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