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여전히 있었다!

엄마, 왜 일본어로 말 안 해요? 하고 딸들이 물었다.

그냥…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안 하고 싶으니까 안 하는 거지. 내가 왜 꼭 일본어로 말해야 되는데?

일본어를 전혀 못 하는 내 딸들에게 엄마는 일본말을 잘 하는 사람으로 인식이 되어 있다.

영어로 하니까 말도 안 통하고 그러니까 정보를 못 얻잖아요…

그럼 그들보고 한국어를 하라지… 엄마는 친구하고만 일본어로 말해.

나는 말이 안 되는 소리로 강짜를 부렸다. 딸들은 어이없는 눈길을 마주치며 썩소를 교류했다. 나도 안다. 일본땅에서 이러면 우리만 손해라는 사실을… 하지만 일본어를 쓰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억지로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1월 28일, 이른 새벽 차 안에서 아침뉴스가 흘러나온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개정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내용을 포함했으며 각 지역 교육위원에 관련 교육을 충실히 하라고 통보했습니다…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란 중고교 교과서의 제작과 수업지도를 규정한 지침서이다.

어이가 없다. 갑자기 뒷덜미에서 붉은 뜨거움이 올라온다.

전에 일본인 친구한테 물은 적이 있었다.

너는 독도, 다케시마가 일본땅이라는 사실을 언제부터 들었어?

그랬더니 최근 몇 년 전부터 뜬금없이 듣기 시작했단다.

그거 알아?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고 그래서 예전부터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랬더니 친구가 말하기를 일본정부는 이상하단다. 난데없이 중국과 센카쿠 열도 분쟁이 시작되는 것도 그렇고 이제는 다케시마가 일본땅이라고… 일본인들은 보통 정부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고...

새벽 공기는 편안하지 았았다. 하지만 내 속과 상관없이 차는 제 갈 길을 달렸고 이후 출장 가는 한 남자와 그를 따라가는 세 여자는 예정대로 하네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동경의 풍경은 지난 20여년 동안 꽤 바뀌어 있었다. 불경기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지만 곳곳이 더욱 발전한 모습이었다. 지진따위를 무서워하지 않는 고층 맨션이 우후죽순 들어섰고 거리는 여전히 깨끗했으며 공기도 말끔했고 빌딩들은 번쩍거렸고 철도선은 한층 얽혀 있었다. 환승역에는 평지 에스컬레이터가 깔렸으며 바쁜 사람들은 그 위에서 축지법을 사용했고 여자들은 과도하게 속눈썹을 붙여 올렸고 사치의 도가니가 느껴지는 분장을 했으며 몇몇은 excuse me하고 말을 걸어도 모르는 척하고 제 갈 길만 갔다. 공공 화장실에서는 변기물을 내리는 손잡이가 완전히 사라졌으며 정확히 한번씩만 물이 내려갔고 입구에 설치된 전자판에 사용가능한 화장실이 표시되었다. 그리고 관광안내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뺀 일반인들은 여전히 영어를 못 했다. 영어 따위 상관없다는 듯 살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인에 비하면 영어를 잘하는 편이다. 공공 장소에서는 영어 안내방송이나 영어 병기도 잘 되어 있다. 한국 지하철을 타면 매 정거장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안내방송이 나온다. 친절이 지나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참고로 미국은 영어로만 나오고 일본은 일본어와 영어 안내만 나온다.

동경의 곳곳에는 안내판이 일본어로만 쓰여 있다. 동경 외의 곳은 더했다.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거나하게 부족했다. 뭐랄까, 일본땅은 일본인만을 위한 곳이라는 인상이 강렬하게 풍겨오는 듯 했다. 아쉬우면 일본어를 배우라는 듯... 심지어 한 TV 채널에서는 지구촌 곳곳에 홀로 떨어져 산다는 일본인 여성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대체 무슨 연유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탐문한다. 대단한 동족의식이며 의아한 관심이다. 언뜻 일본은 내 가족만 잘 챙기는 속 좁은 여인네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울 것 없는 돈많은 여인네의 방자가 엿보였다.

근자에 한국에서는 일본은 죽었다, 일본에는 미래가 없다는 말들이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현지를 여행하면서 그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금치 못했다. 1인당 GDP가 두 배 정도(한국 2만 달러, 일본 4만 달러선) 차이나는 만큼 한국이 중산층이라면 일본은 상류층 같은 분위기를 지녔다.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더니 그들이 선진국인건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발전한만큼 그들도 저만치서 걷고 있었다.

그런 일본을 돌아보는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떠올랐다. 돈만 있으면 죄가 없어진다. 독도를 두고 분쟁하는 이 싸움. 유전무죄가 현실이 될까 가슴이 무겁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각심을 늦추어서는 아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