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기동안은 딸들이 그저 학교에 가기만 하면 되었다. 5,6교시동안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딸들은 얻을 게 많았다. 한국학교 체험, 한국어 공부, 한국 문화 습득, 인내심 훈련… 나는 두 딸의 담임선생님께 딸들에게 학업적으로 부담을 주시지 않도록 간곡히 부탁드렸다. 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학업이 아니고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부모가 공부 시키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 어떨떨하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두 분 다 내 마음을 헤아리고 존중해 주셨다. 딸들의 첫번째 행운은 그런 담임을 만났다는 사실일 것이다. 오랜 시간을 해외에서 보내고 귀국하는 자녀의 학부모께서는 아이의 담임선생님과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아이의 입장을 잘 전달시키시라고 권한다. 단 담임 선생님께서는 많은 학생들을 지도하고 계시므로 부담스런 부탁은 금물이다. 그저 알릴 것을 알리고 이후로는 선생님께서 알아서 해주시리란 믿음을 가지자. 그리고 명심할 일은 내 아이는 내가 지도하고 도와야 한다는 사실이다.

선생님께서 많은 신경을 써주셔도 아이가 친구와 잘 어울리지 못한다면 학교 생활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가 어릴수록 부모의 도움은 비례적으로 크게 작용할 것이다. 단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인 경우는 아이 스스로 그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딸들이 친구를 사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 

작은 아이의 경우는 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초대하여 강아지도 보여주고 미국에서 가져온 물건이나 장난감도 함께 가지고 놀며 익숙하지 않은 한국 놀이에 대해서는 따로 연습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좋아지지 않는 공기놀이는 포기했고 친구들이 공기를 할 때는 혼자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지만 다른 게임을 할 때는 같이 어울려 노는 순발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막내는 공기놀이만 하는 친구들을 야속해 했다. 엄마가 나서야 할 때는 그런 시점이었다.

"너 역시 네가 하고 싶은 놀이를 하고 싶 듯 친구들도 마찬가지겠지. 친구들은 자기가 놀고 싶은 것을 놀  권리가 있고 너는 그걸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네가 그 놀이에 끼고 싶으면 열심히 노력해서 잘 하거나 아니면 그 시간동안 다른 놀이를 하거나 또 혼자 책을 읽어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즐겁지도 않은 놀이를 억지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엄마의 조언을 들은 아이는 제 나름의 해결책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조언은 해줄 수 있지만 막상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이의 몫이니 엄마는 찬찬히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때그때 아이에게 적정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 큰 아이는 처음부터 친구들이 마음을 열어 잘 받아주었는데 그 이면을 보면 역시 자신의 노력이 들어 있었다. 우리 딸들은 친구들을 좋아하고 상대에게 잘 맞춰주는 성정을 지니고 있고 자랑을 삼가는 성격이다. 하지만 아무한테나 스스럼없이 다가가 먼저 손을 내밀거나 상대를 리드하는 호탕한 성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친구를 잘 사귀는 데엔 알고보니 약간의 노하우가 있었다.

"새 친구를 사겨야 할 때는 hard working을 해요. 항상 그러지는 않지만 새 친구를 사겨야 할 때는 적극적으로 다가가요. 예를 들면 처음에 선생님께서 학교 소개를 해주라고 부탁한 친구가 있다고 해봐요. 학교 투어를 하면서도 되도록 많은 대화를 나눠요. 그리고 다음에도 그 아이한테 가서 내가 **에 가야하는데 잘 모르겠으니 함께 가줄 수 있어?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대부분 같이 가줘요. 또 식당에서는 옆 친구에게 우리 학교 식당에서 어떤 음식들이 맛있어? 너는 한류스타중 누구를 좋아해? … 등등 뭐 그런 말들을 물어보고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는 거예요…”

무엇이든 노력을 하면 댓가를 얻듯 친구를 사귀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랬다. 큰 아이는 전학이 잦은 편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 노하우를 터득한 모양이었다. 기특하면서도 가슴 찡한 노하우였다.

물론 아이마다 성격이 다르니 선뜻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낯 선 환경이 두려워 옛 것만 그리워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다그치지 말고 공감해 주나 익숙해지면 나아질거라는 희망을 주는 것이 중요하리라. 또 당분간 부모가 친구처럼 굴어도 좋을 것이다. 친구처럼 이것저것 같이 하자하고 우리 딸/아들과 함께 있어서 너무 좋다… 등의 멘트도 겁나게 날린다. 원하는 애완동물을 키우게 해도 좋다. 우리 딸들이 우리 강아지한테 가지는 애정과 감정의 교류는 마딱뜨린 불행?을 상당히도 상쇄시켜 주었다. 아이가 행복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표가 난다. 흥얼대던 노래소리가 없어지고 표정이 어둡고 작은 일에 공연히 심통을 부린다. 그런 이상 징조를 발견하면 가장 먼저 돌입해야 하는 관문이 대화이다. 아이가 쉽게 말문을 안 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건 아이를 탓 할 일이 아니다. 부모인 나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아이들도 생각이 있고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을 하므로 부모에게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대화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반면 부모가 공감해주고 이해해주고 때로는 고민을 해결도 해준다는 믿음을 가지면 아이들은 오히려 말을 하고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아이가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면 먼저 내 태도를 살펴서 고치도록 노력하자. 그늘이 넉넉해야 쉼 터가 될 수 있다. 자식 키우는 일만큼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도 없다. 하지만 무엇이든 노력을 하면 상응하는 댓가는 반드시 찾아온다.

사람이 살면서 환경을 극복한다는 사실은 인생의 성공과도 직결되는 이야기다. 나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인생관을 무지 사랑하는데 이 말은 환경을 극복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두려워하고 익숙해진 생활에 안주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본능을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고투를 극복하고자 우리는 생각을 하고 계획을 짜고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과 극기의 훈련, 어려움을 극복하고 느끼는 성취감 등을 주는 환경은 그래서 전 생애를 통해 좋은 영양분을 제공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귀국을 준비하는데 아이들에게 무엇을 선행시키면 좋을 지 물어보는 분들이 계시는데 짧게 조언을 드린다면 무엇보다 한국어를 열심히 가르치시라고 권하고 싶다. 언어는 곧 생활이다. 학교도 친구도 한국어를 많이 알수록 적응이 수월해진다. 수학도 과학도 언어다. 최소 공배수, 최대 공약수를 모르면 수학도 알 수 없다. 허나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와 심리적 안정과 자신감을 심어 주는 일일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 친구들은 영어를 잘 하고 싶어하니까 너희들이 영어공부를 도와주고 미국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면 좋아할거야.’ 라던가 ‘한국에는 정말 맛있는 음식들이 많아서 식사시간이 즐거울 거야’라던가 ‘한국도 잘 알고 미국도 잘 알면 나중에 두 나라에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라던가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많은 친척친구가 있는 지 알면 깜짝 놀랄거야’… 등의 말들은 우리 딸들에게 긍정적인 희망을 주는데 큰 효과를 발휘했다.

우리 가족이 한국에 와서 무조건 행복해요,라는 말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조금씩 행복해지기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그 댓가를 맛보는 달콤함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할 수 있다. 나와 내 딸들은 그 순리를 기대하며 오늘도 앞으로 걸어간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모든 결과는 경우에 따라 다르고 인간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르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허나 반드시 내가 어찌 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은 달라진다. 구구절절 말이 길었지만 진리는 단 한 줄 그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