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한국에 오니 그게 아니었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그것이 활동반경이 넓어진 탓도 있었고, 한국의 의생활 문화가 미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탓도 있었고, 주위의 시선도 있었고, 복장문화를 중시하는 한국의 풍습 탓도 있었다. 20여년 전 한국에서는 스키장에 가도 청바지나 골덴 바지면 알맞았고 등산을 가도 청바지나 면바지면 적당했다. 하지만 요즈음은 아니다. 백화점 의류코너에도 상당히 넓은 부지에서 스포츠용 의류를 판매하고 있는데 바로 그 높은 수요층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 프로 산악인이 한국인들은 에베레스트에 오를만한 입성으로 동네 산을 탄다고 했다던데… 그것은 매우 알맞은 지적이었다. 사실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놀랐던 켤쳐쇼크중 하나가 스포츠 의류문화였다. 그들은 테니스를 칠 때는 테니스화를 신었고 조깅을 할 때는 조깅복을 입었다. 자전거를 탈 때는 폴리 우레탄이 많이 함유된 의류를 착용하고 헬멧을 썼으며 해변에서는 칠십 노인도 수영복을 입었고 비키니도 마다앉는 중년여성들이 수두룩했다. 테니스화인지 트래킹화인지 구분도 못하고 헐렁한 치마에 운동화를 신고도 조깅할 줄 알았던 나와 그들 사이엔 의복문화의 높은 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랬던 것이 그로부터 14년 하고 9개월이 지난 현재는 한국에서 그 드높은 담을 느낀다. 역시 한국은 발전이 빠르다.

옷의 수량은 매우 적지만 나름 센스 있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고 또 스스로도 ‘센스는' 있다고 생각하며 살던 나는 어느날 동네의 한 부인으로부터 참 수수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꽤 수수한 여인으로부터 말이다. 쇼크였다. 수수가 순수한 그 수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발이 저렸던 모양이다. 백화점에 갔을 때였다. 다른 손님한테는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나를 쓰윽 일견한 후 관심을 두지 않는 점원들을 거푸 대하면서 이건 어떤 시츄에이션이지?라는 의문을 품었다. 나는 윈도우 쇼핑은 안 한다. 이상히도 그 버릇이  들어서 쇼핑을 하면 한 가지라도 사야한다. 즉 나는 무언가 살 것이 있어야만 백화점에 간다. 시간을 들이고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면 내 계산법에서는 손해였다. 그러므로 나는 틀림없는 잠재 구매자인데 그들은 나를 몰라봤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어리둥절 하다가 그런 일이 여기저기서 반복되자 슬슬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들은 내가 꼭 사려고 온 사람인지 그냥 놀러온 사람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행색으로 내가, 특히나 비싼 옷(내 기준으로)을 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산이 내게로 오지 않으니 내가 산으로 가야했다. 그들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러는 와중에 왜 나는 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요즘 한국에서는 통넓은 바지를 입는 사람들이 없다. 그 곳에 있는 모든 바지는 흡사 청바지의 레깅스화, 면바지의 스타킹화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10년도 넘은 빛바랜 통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환영받는 다른 여인들은 좁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패션 슈즈를 신고 가방도 잘 매치된 것을 들고 있었다. 나는 코스코에서 산 5년쯤 된 스케쳐스 운동화를 신고 딱 하나 있는 가방을 언제나처럼 들고 있었다(그러고보니 나는 가방도 한 개다) 그런 가시적 차별성에 의해 나는 간단히 분류되었던 것이다.

이 바지도 함께 입으시고요, 탈의실 안에 있는 신발을 신고 나와보세요. 상의를 사려는 내게 그들은 그런 친절도 베풀었다. 그렇게 입으시는게 세련되 보여요… 무언가를 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판매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건 세상의 이치였다. 상품을 팔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살 사람한테 소중한 시간과 공을 들여야 득이 있는 법이다. 이것저것 입어만 보고 사지 않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대해보았겠는가. 그러니 따지고 보면 문제는 내게 있었다. 내가 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나는 또 천사와 악마의 소리를 동시에 듣는다. 왜 그들은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가, 하지만 그들이 남의 속을 어찌 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