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이 지나자 아침 저녁이 마술같이 서늘해졌다. 워찌 요로코롬 신기한 일이… 찜통 속같은 더위 때문에 에어컨 발명자 Willis Carrier 에게 감탄과 감사를 퍼부으며 지내던 중 말복(입추)을 맞아 나는 말만 입추려니… 했건만 이후 정말 거짓말처럼 냉매를 통과한 공기가 따로 없는 아침 저녁이 도래했다. 태풍의 영향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왠지 오늘은 그냥 우리 선조가 겹겹이 쌓은 365일을 재고 따져서 만든 24절기에 한 표를 던져주고 싶은 마음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편리함과 호사는 인류의 선조가 이루어놓은 문물과 문명 덕이기 때문이다. 양력이 나오기 전 음력으로 24절기를 나누어 시와 때를 구분하게 한 지혜는 말할 것도 없다. 물질적인 발달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타당한 권리(여성들은 더우기)를 지니고 살 수 있게 된 것도 선인들의 커다란 업적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아픈 역사를 품은 대한민국에서는 특히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선인, 조선 민족의 독립을 이룩한 선조들 덕에 오늘의 자유와 평등을 누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기마냥 잊고 지냈던 고마움을 그 의미와 함께 되새기고 싶어지는 날, 오늘은 8월 15일, 조선이 '빛을 되찾은 날'이다.

광복절을 맞아 천안시에 소재한 독립기념관에 다녀왔다. 기념관을 둘러보는데 가슴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교육은 어려서 받았으나 광복의 의미와 감동, 선조들에 대한 감사는 황망히도 오늘에서야 솟구쳐 올랐다. 나는 내가 이럴 때 좋은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그 느낌때문이다.

넓은 독립기념관에는 놀라울만큼 후손들이 바글거렸다. 손에 태극기를 든 아이들이, 3.1 운동과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기게 도와주는 전시물과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천진한 고개를 쉼없이 끄덕였다. 아슴프레한 아프고 벅찬 기억을 떠올리며 걷는 노인들의 발걸음은 생각의 무게때문인지 한없이 버거워보였다. 햇살은 짱짱해졌고 비 온 뒤 끝의 공기는 푸른 맛을 흘렸다. 이런 날, 물놀이 대신 독립기념관을 찾는 부모와 아이들을 비춰주느라 하늘은 더욱 반짝반짝 빛을 냈다.

 

우리 선조들의 선업중에 비폭력 저항이라는 것이 있다. 무모하면서 숭고한 정신이 바로 이 비폭력 저항이다. 눈 앞에 총과 칼을 든 사람이 있는데 그 앞에서 맨 손으로 만세를 외칠 수 있는 용기는 만용이라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법도 하다. 칼에 찔리는 아픔과 총에 맞아 목숨을 잃게 될 두려움을 넘어선 용기는 100 여 년이 지난 현재의 땅에서도 사람들 가슴에 소름을 돋운다. 1919년 3월 1일 이라는 시간의 순간에 ‘나라'라는 보이지 않는 형체를 갈구하며 귀하고 절실한 자신의 살과 피를 내던진 사람들. 그 운동을 계기로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지고 국내외에서 본격적으로 대한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 시작한 긴 투쟁은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열매를 맺는다.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자유독립을 되찾은 국가들이 있다.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집트,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비폭력 무저항운동 … 당시 전 세계를 자극시킨 3.1운동의 만세소리는 힘이 약해 짓밟힘을 당하던 주변국의 호국정신을 혼쭐나게 흔들어 세웠다. 인간의 욕망은 한결같다. 힘이 세든 약하든, 돈이 많든 없든, 학식이 풍부하든 무지몽매하든, 재주가 많든 무재주이든, 인간은 자유와 평등을 갈망한다. 자유와 평등은 단지 민주주의 기본 정신만이 아니다. 작금의 세상에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이미 그 자유와 평등을 가질 권리를 부여받은 존재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 밑에 어떤 사람이 있으면 안 되고 어떤 국가로 인해 어떤 국가가 주권을 빼앗겨서도 안 된다. 이 귀한 뜻을 유관순 열사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에서 이렇게 외친다.

만국이 평화를 주장하는 금일을 당하야(…) 우리도 비록 규중에 생활하여 지식이 몽매하고 신체가 연약한 아녀자 무리나 국민 됨은 일반이요 양심은 한가지라(…)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두려워 할 것도 없도다. 살아서 독립기(independent flag) 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괴함이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의무가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노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중에서-

그 어떤 선언서의 외침보다 웅대하고 장렬함을 느낀 건 단지 내가 여자이기 때문은 아니리라. 새삼스레 감사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은 14년만에 맞은 이 땅의 광복절이 준 커다란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