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로 예정된 모임에 선생님을 모시고 싶었다. 나를 기억하실까, 설마… 한 친구가 30년도 넘은 과거에 대한 선생님의 기억력을 못 믿어워 한다. ‘선생'일을 천업으로 삼은 한 친구는 호언장담한다. 첫 담임 때 애들은 다 기억나... 선생님은 우리 반이 첫 담임이셨다. 그래도 그렇지... 30년도 더 넘은 이야기쟎아. 이번엔 나도 슬그머니 자신이 없어졌다. 게다가 선생님께 제자란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도록 잔뜩잔뜩한 학생들이지 않던가. 허니 기억이 가물가물하신대도 할 수 없다. 나로서는 그 편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우리가 또렷이 기억하고 있잖은가. 그러면 됐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선생님께 초대의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세상에… 어쩜 그럴 수 있을까. 그 목소리, 그 말투가 33년 전 그대로이신 것이다. 지극히 여성스러우시고 똑부러지게 영어를 가르쳐 주시고 웃는 입매가 아름다우셨던 선생님, 선생님은 그 기다란 밧줄을 싹뚝 잘라 두 딸의 엄마이며 마흔 중반이 되버린 한 여인을 순식간에 열 세살 소녀로 탈바꿈 시키셨다.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잊어… 꺄르르 꺄르르르 나는 마냥 신기해서 웃었다. 술냄새 퓽퓽 풍기며 여학교 교정을 찾아오셨던 울 아버지도 기억하실까? 단짝 친구하고 싸워서 울먹이며 상담을 했던 그 여린 소녀로 기억하시겠지? 지금은 목청 커지고 무서운 게 없어진 아줌마 똥배짱으로 득실득실해진 나를 말이다. 빼싹 말라서 새초롬 했잖아. 지금처럼 이렇게 꺄르르 거리며 웃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토록 생생한 그림이 그려지실까.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 머리 속에는 어메이징이라는 단어가 뱅글뱅글 돌아다녔다.

남편따라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왔어요...

너도 같이 공부하지 그랬어?

선생님 저는 공부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래, 그럼 아이들을 열심히 키우면서 살았겠구나.

아, 그렇지도... 않구요…

아이들한테 올인하는 엄마들의 세계를 알기에 나는 그마저도 자신있게 네, 라고 말씀 드리지 못 했지만 선생님은 살갑게 웃으셨다. 그리고 나는 그 웃음 안에 들어있는 따스한 말씀을 듣는다. 괜찮아. 아무려면 어떠니, 그래도 너는 내 제자 김연아인걸…

이 세상에 사랑으로 이루는 부부지간, 혈연으로 이루는 부모형제지간, 우정으로 이루는 친구지간, 악연으로 이루는 원수지간, 이익으로 이루는 비지니스 파트너지간...이 있다면 사제지간은 무엇으로 이룰까. 존경과 사랑? 자애와 믿음?…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33년만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쩌면 그 사이는 추억으로 이루어져 있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학생은 수많은 선생님을 만나고 선생님은 더더 수많은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둘 사이에 추억을 공유하지 않으면 그건 무늬뿐인 사제지간이 될 지 모르겠다. 즉 선생님과 제자 사이에는 지식의 전수 말고도 인간적인 교감, 교류가 들어있어야 한다. 지식만 주고 받는 사이에서는 공유할 추억이 없는 때문이다.

이제 며칠 후면 선생님을 뵙는다. 그리고 추억보따리에서 꽃다운 선생님과 어린 제자들이 튀어나와 마당극을 펼칠 것이다. 생각해보면 미국 살면서 채워지지 않던 내 20%의 행복은 이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