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대한 단상과 두가지 감동

인생이 하얀 도화지라면 여행은 빨간 크레용쯤 될까. 사랑은 핑크빛, 싸움은 암갈색, 친구와의 우정은 초록, 예술은 아쿠아 블루, 의식주는 바탕색 베이지… 하루하루를 살면서 길고 너른 도화지 위에 여러가지 색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인생이라면 삶에 활력과 행복을 선물하는 여행이 내겐 빨간색쯤 될 듯 싶다. 한 방에 지루하고 밋밋한 일상을 생동감있게 살려주니까.

사계에따라 여행의 이름이 달라진다. 봄에는 꽃구경, 여름은 바캉스, 가을 단풍놀이, 겨울엔 눈꽃여행… 여행에는 자연을 벗삼는 이런 나들이도 있지만 유럽 여행, 남미 여행, 아프리카 탐험 등과 같이 새로운 문물을 탐색하는 여행도 있다. 또 마음을 달래기위한 이별여행, 추억을 되새기고 싶은 기념여행, 특권을 누리는 신혼여행, 배려의 마음이 담긴 효도여행, 취미를 즐기는 골프여행… 각자의 삶과 개성의 다양성만큼 여행을 하는 이유는 천차만별일 터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그냥 좋아서 여행을 한다. 여행을 하는데 특별한 목적은 없다. 거기서 반드시 얻어내야 하는 것도 없다. 꼭 세세히 계획하고 안달을 내지 않아도 여행은 예기치 않은 선물을 준다. 그 선물은 항상 값지다. 누군가를 계산없이 좋아하는 마음이 진실한 사랑인 것처럼 진정으로 여행을 좋아하게되면 그냥 떠나는 것만으로 행복해진다. 여유가 없다면 여행을 꿈꾸지 못하므로 그것만으로도 좋은 징조다. 그 여유란 돈과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행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에게 여행의 목적과 그 추구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한가지 공통점을 들자면 ‘마음의 여유’일 것이다. 설령 마음의 여유 없이 내딛은 발걸음이라도 여행을 하다보면 그것이 절로 생긴다. 그러니 여행 안에 들어있는 만국공통어는 마음의 여유라 하겠다.

여행은 낯선 너를 호기심있게 바라보다가 결국 너를 껴안아 내 속에 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신경을 여러 사람에게 분산시키지 않아도 되는 가족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우리 부부는 타인에게 배려심을 꽤 발휘하는 편이어서 누군가와 함께 있게되면 그들과의 좋은 시간을 만드느라 다른 것은 잘 못 챙기는 편이다. 여행을 적당히 좋아하면 모르겠는데 너무 좋아하니까 이런 마음이 생기는가 보다. 왜 애인이 너무 좋으면 항상 둘만 같이있고 싶지 않은가. 아마 그 애정이 조금 식으면 낯선 너보다는 친숙한 우(友)와의 추억이 더 값있게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 그럴 시기가 되면 언제고 마음 맞추어 세상구경하러 떠날수 있는 친구네가 옆에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여러 사람과 동행해야 더 맛이나는 여행이 있다. 바로 단풍구경이다. 같이 피크닉도 하고 사진도 찍고 단풍을 눈에 담으면서 나누는 이야기는 정겹고 어여뻐서 마음에 콕 박힌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풍놀이는 인생의 선배분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다. 연륜에 녹아있는 삶과 철학과 지혜가 단풍물처럼 흘러나오는 시간은 가을의 정취를 그보다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없다.

올 해는 남편 직장 선배님들과 함께 다녀왔다. 그중 제일 젊은 울 남편이 운전을 맡고 제일 연장자이신 선배님이 식사를 제공하시고 중간 선배님은 여행을 총지휘하셨다. 직접 운전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이 땅에서 잠시 그 수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방감에 어찌나 행복을 느끼시던지… 할 수 있다면 더 멀고 긴 시간동안 운전을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꽉 찬 7인승 승합차 안은 여행 내내 정겹고 화기애애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두가지 사실때문에 마음에 진한 감동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는 노래와 관련된 것이다. 둘째 선배님 부인께서는 프로 합창단원이신데 달리는 차 안에서 청중이 청하니 선뜻 노래를 부르셨다. 충분히 고운 목소리로 신청곡을 세 곡이나 불러주셨는데, 실은 피곤때문에 목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노래를 한 이유가 따로 있다고 하셨다.

"친정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야, 피아노 좀 쳐보렴,하시면 우리 아이들이 그렇듯 늘 싫다고 했어요.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니 뭐가 어려워서 그 청 한번을 들어드리지 못했나.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요..."

아무리 프로라해도 달리는 차 안에서 반주도 없이 노래하는 일이란 얼마나 뻘쭘한가 말이다. 아버님과의 일을 교훈삼아 타인에게 최선을 다하는 그 분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져서 많이 따뜻했다.

또 한가지 감동은 환갑이 넘으신 큰 선배님때문에 받았다. 그 분은 매우 애처가이신데 내외간의 금술이 비정상이라고 할수 밖에 없을만큼 좋다. 그런데 11시간동안 밀착동행한 결과 그 비결을 알게 되었다. 부인께서는 시종일관 유쾌한 농담을 건네시며 자신을 낮추고 남편을 높이셨다. 누구에게든 적절한 칭찬을 하며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특장점뿐 아니라 재미있고 상냥하고 사려심 깊은데 그런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을까. 그러면서도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니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예요,란 고단수 노하우를 제대로 꿰뚫은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인이 비결이신가 했다. 그런데 그 남편께서 말씀 하셨다.

“항상 잘 지켜주겠다고 혼인서약을 했는데 아내에게 잘못하면 되겠습니까. 부모나 자식한테는 조금 못해도 양해를 구할 수 있다지만 아내한테는 그런 하찮은 변명을 해선 안되겠지요…”

그 한 말씀에 나는 뾰~ㅇ 갔다. 자족을 잘하는 덕에 남을 잘 부러워하지 않는 나도 그 부인이 참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큰 남편을 가졌으니 세상에 무서울 것이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고, 자식에대한 사랑은 본능이지만 배우자에대한 사랑은 인격이란 생각이 들었고… 아무튼 정신없이 감동을 받느라 감탄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순(耳順)의 부인은 사랑스럽고 남편은 울타리처럼 듬직하고… 그런 상생관계를 가진 부부가 곁에 계셔서 보고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