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여심

길을 걷는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때로는 지익지익 소리를 들으며… 발 밑은 마르고 오그라든 잎들의 무덤. 가을이고, 이미 숨 죽은 낙엽과 아직 살아있는 단풍과 걷는 사람, 달리는 사람, 자전거를 타거나 롤러 블레이드를 굴리는 사람들 위에 청량한 햇볕이 쏟아진다. 노란 낙엽과 선홍색 잎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며 내려온다. 무덤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부려보는 처연한 몸짓이다. 인간의 마지막 가는 모습도 저리 아름다우면 좋겠다.

막내가 타운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1시간동안 나는 멋진 방황을 한다. 유랑 부인이 되어 발길 닿는대로 돌아 다닌다. 다운타운에 있는 옷가게 쇼윈도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커피향이 그윽한 카페 앞에서 심호흡을 들이키고, 꿰어서 보물이 된 구슬들도 감상하고, 유모차 안에서 양말을 벗겨내고 제 엄지발가락을 빠는 아기한테 귀여워 죽겠다는 눈길을 던진다. 딸들 라이드를 할 때면 보통은 차 안에서 책을 읽는 편인데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타운 오케스트라에서 설익은 선율을 뿜어대는 1시간동안은 그 자유로운 가락처럼 나도 일탈을 하고싶어진다.

지난 주에는 다운타운 뒤쪽으로 연결된 트레일을 걸었다. 우리 타운에는 멋진 자전거 도로가 있어서 감사하다. 길고 좁고 쭉쭉 뻗은 아스팔트 길섶에는 나무가 즐비하다. 지난주 그 곳은 단풍이 초절정이었다. 잎에서 엽록소가 막 빠져나간, 생기있고 신선해 보이는 단풍들이 나무마다 울긋불긋 난리도 아니었다. 푸르딩딩한 하늘에 양털구름 샛노란 햇살, 주홍, 초록, 황금빛 잎새들, 야들야들한 바람… 아무도 우울한 기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도록 사방 천지가 산뜻했다.

이번 주는 절정을 막 지난 자연의 원숙함이 도처에 놓여 있다. 단풍은 낙엽이 되는 순리를 거부하지 않고 길마다 소보록이 쌓여 발걸음마다 사각사각, 바람따라 지익지익 소리를 냈다. 듣기에 매우 아름다운 청음이었다. 그 청음 위로 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내 그림자는 사십 중반의 나이이니 이 계절처럼 원숙함을 노래해야 할 때이다. 문득 나는 지금 매력적이고 듣기에 고운 소리로 삶을 예찬하며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가?란 물음이 떠올랐다. 그 답을 궁리하는데 고개가 숙여진다.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나이 마흔 넷, 통계상 삶의 고통이 정점을 찍는 나이라한다. 모르는 척 꿈을 꾸기엔 현실이 많은 이야기를 하는 나이. 한마디로 철이 들어서 허황함이 사라져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그러기엔 아직 아쉬움이 많아서 갈등도 일고 몸부림도 거세진다. 이러다 기운이 빠지면 곧 양순해 지리라. 그런 날이 오는 것이 두렵고 그런 날이 오면 마음이 편할 것같아 기다려지기도 한다. 주변에 계신 많은 인생 선배들이 4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하신다. 훗날 나라고 다를 바 없겠다.  40대를 멋지다고 추억하는 사람은 어쩌면 30대 아니면 5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르리라. 좋은 시절은 주로 그렇지 않은 시절과 맞닿아 있다.

나무기둥에 커다란 사진이 걸려있다. 잃어버린 개의 사진이다. 사례를 할터이니 연락을 해달라고 한다. 언뜻 보기에 늑대처럼 부리부리하게 생겼는데 무서워하니 절대 쫓지는 말라고 당부한다. 개를 애타게 찾는 주인의 심정, 그 주인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허우대만 억센 개의 여린 마음이 태극 무늬처럼 뱅글뱅글 돌아 가슴에서 일렁인다. 자식같은 개와 부모같은 주인은 이 휘황한 자연을 웃고 즐기는 사람들 속에서 더욱 외롭고 삭막함을 느끼겠다. 문득 웃지 않는 내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보면 그런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닥친다. 두번 살면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순간… 그런 순간이 적으면 인생은 평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을 겪으면서 자아는 성숙해진다. 그래서 어떤 것이 더 나은 삶인지 저울질 하기는 쉽지 않다.

잃어버린 개처럼 생각이 갈 곳을 잃는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지자로 흔들리는 심상이야말로 가을을 걷는 사람들이 거치는 통과의례일지 모르겠다. 아! 스무살 꽃처녀라면 봄을 탈텐데 중년의 나는 가을을 탄다.

2012년 10월 중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