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생님과 우정을 느끼는 밤…

김선생님댁 거실에는 성경구절이 담긴 액자가 걸려 있다. 김선생님은 남편 교회의 장로님이시다. 아흔을 바라보시는 장로님은 전직이 선생님이셨기도 하고, 장로란 호칭으로 불리기에 당신은 그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선생이 좋다 하셨다. 그 깊은 뜻에 감복해서 마음으로부터 존경심을 가지고 나는 기꺼이 장로님을 선생님이라 불러드린다.

네모 반듯한 서체가 이쁘기도 하고 낙관 찍힌 한지도 근사해서 무심코, 김선생님, 저 액자 참 예쁘네요. 나중에 저 주세요. 하고 여쭈었다. 나는 그냥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타인도 값어치 있게 여겨드리면 기쁘실 것 같아 어리광 부리듯 그런 말을 했을 뿐… 이후 그 일에대해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성탄절에 김선생님께서 액자를 가져가라 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데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김선생님은 어지럼증이 있어 자주 넘어지신다. 저번에도 응급실에 실려가셨다가 회복실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뵈었는데, 나날이 쇠약해지시는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두 손을 꼭 잡고 오래 사셔야지요,란 말씀을 드렸더니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건강하게 살다가 가느냐가 관건이지, 하셨다. 네,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지요…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고 기원을 드린 것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분이므로 혹 하나님의 부르심을 예지하신 걸까, 그런 생각이 들어 화들짝 놀랐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냥 드린 말씀인데… 내 목소리는 급 축축해지려고 했다. 마음에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오지 그냥 하는 말이 어딨소? 기쁜 성탄절 선물로 드리고 싶으니 꼭 와요. 나는 부언하신 말씀에 조금 안심을 하고 그 강력한 권유에 알겠노라 약속을 드리고 말았다.

딸이 좋아요… 딸 둘인 내게 덕담을 해주시곤 했다. 딸이 좋으신 김선생님은 혼자 사시던 노인아파트 생활을 정리하시고 막내 따님 댁으로 들어가셨다. 우리집 대장이라 내가 우리 딸 말을 잘 들어야 하거든… 근데 오늘은 딸이 하지 말라는 걸 그냥 하기로 했어요. 2년 전, 속회 모임에서 보스톤 미술관에 가기로 했을 때 간편한 복장과 운동화 차림으로 나오신 김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하신 말씀이다. 괜히 젊은이들 노는데 노인분이 끼지 마시라고 했다지만 꼭 같이 가고 싶어서 나오셨다는 것이다. 꼭 나오셨어야지요, 잘 하셨어요, 젊은(?) 우리들은 진심을 담아 응대해 드렸다.

사실 그때 나는 김선생님 말씀을 듣고 놀라는 한편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안에 순리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달이 차면 기우는 순리, 폭풍 전 녹아 없어지는 바람의 순리, 배고픈 아기가 온 힘을 다해 울음우는 본능의 순리, 비오면 잎이 푸르러지고 살이 물컹해지는 대지의 순리… 세상에 이런 순리가 있 듯 인간이 태어나 사(死)할 때까지 누구든 예외가 될 수 없는 생의 순리가 있다. 갓난쟁이가 부모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고 자라나, 성인이 되면 독립을 해서 스스로의 힘을 키워가고, 결혼 후엔 후손을 낳고 그 가정을 어깨에 메고 묵묵히 걸어가다가, 자식들 떠나면 다시 홀로 서기로 돌아갔다가, 가진 힘 다 잃게 되면 온순해져 나약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생… 그믐달처럼 기운 생을 맞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나는 ‘내가 우리 딸 말을 잘 들어야 하거든…’이라 하신 김선생님의 말씀에서 보았다. 진정으로 성숙한 분의 삶의 철학이 느껴졌다. 나는 김선생님 덕에 동그랗게 이어진 생의 순리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번에 만나 뵈었을 땐, 좋아 보이셔요 하고 인사를 드리자, 나는 항상 좋아요.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도하라… 이렇게 살고 있으니 좋을밖에…

나이 들수록 명심하고 쌓아야 할 덕목 중 하나는 고운 말일 것이다. 말은 생각을 대변하고 생각이 곧고 고우면 말도 반듯할 수밖에 없다. 불교용어에 구업口業이라는 말이 있다. 말로 짓는 죄라 했다. 입으로 남을 속이고(妄語), 욕이나 험한 말로 남의 속을 뒤집고(惡口), 이간질로 화합을 깨고(兩舌), 요상한 말로 현혹시키는(綺語) 네 가지가 바로 구업이다. 구업을 지양하는 것만으로도 선업(善業)을 쌓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한다. 김선생님께 마음으로부터 친근함을 느끼고 사리 분명하시고 지혜로운 분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된 이유도 하시는 말씀마다 모두 옳고 바르시기 때문이다. 나는 근 90 연세에 어쩌면 저리 고운 남자분이 계실까, 속으로 감탄을 했다.

신문에 컬럼을 썼을 때는 꼬박꼬박 찾아 읽으시며 지난 번 글 참 좋았어요,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고, 상 받았을 적에는 자식 일처럼 기뻐해 주시고, 따님과 만났을 때는 자랑스러운 친구라고 소개해 주시니 우리 할아버지가 귀여워 해주셨 듯 나는 김선생님께 조부의 정을 느끼는가 보다. 할아버지가 오래오래 사시길 원하는 마음은 손녀의 본능일 터, 소중한 액자를 받아와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고 눈길 닿을 적이면 김선생님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하고 기원을 한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것이다…

이제 때때로 하나님 말씀 안에서 평온과 희망을 본다. 다 김선생님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