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폭풍 니모(NEMO)

니모는 자분자분 다가왔다. 예의바른 아이처럼 함부로 굴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예보로 소식을 전해왔고, 죽은 바람의 흔적에 묻어 임박을 드러냈고, 한 송이씩 떨어지면서 긴 행렬의 시작을 알려왔다. 오래된 여정길이었음이 보였다. 지친 몸 허물어지 듯 내려앉은 니모는 지붕살에 부딛혀 제 몸을 부수었다. 파편들은 바람에 쓸렸고 알알이 부서져 풀풀 휘날렸다. 바람에 엉겨들다가 바람에게 버림받고 슬프게 땅 위로, 나무 위로, 깃대 위로 내동댕이 쳐졌다. 제 몸에 제 몸을 포개서 울음을 끌어안고 축축하게 포효했다. 차갑게 울고 뜨겁게 울었다. 나무잎을 움켜잡고 울고, 깃발을 짓이기며 울고, 땅을 후벼파면서 울었다. 울다가 지치니 그제야 피어났다. 눈사람으로 환생하고 눈뭉치로 날아다니고 눈 꽃으로 피어났다. 살려고 몸부림치면서 살아났다. 그러다 바람이 내치면 다시 쓰러졌다. 니모는 하얗게 태어나 하얗게 피다가 하얗게 울면서 그렇게 죽어갔다.

세상에 길은 있지만 길이 없어졌다. 그 길을 뚫기위한 뉴잉들랜드의 제설작업은 예술이었다. 눈폭풍에 대비하는 사회의 일사분란한 움직임도 예술이었다. 그것은 정교, 기품, 날렵, 정통성의노하우를 지녔다. 먼저 휴교령이 내려졌다. 휴무령도 내려졌다. 전 날, 비상 식량을 비축하려는 사람들로 마켓이 붐볐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세상은 덧옷을 입고 서서히 무거워졌다. 사람들은 집 안에서 옹송그리고 굴뚝마다 허연 연기가 풀려나왔다. 그러다 예닐곱시간 만에 운전금지령(driving ban)이 내려졌다. 운전을 한다는 행위만으로 벌금형 혹은 1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진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정신은 날아갔다.

눈이 쌓였다. 발바닥만큼 발목만큼 무릎만큼 허리만큼 쌓여갔다. 콘도 관리사무실로부터 날아든 찌라시. 금요일, 토요일에 쌓인 주차장의 눈은 일요일 아침 9시에 치워질 예정이므로 9시 이전까지 자신의 차에 쌓인 눈을 걷어내고 주차장을 비울 것. 이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차는 멀고 먼 땅으로 유배될 것임. 단단하고 천편일률적인 지령이 내려지자 인간이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 역시 환경에따라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경계선을 넘나든다는 감상이 밀려왔다. 일요일 아침의 달콤한 늦잠도 날아갔다.

동서고금으로 자연에대한 인간의 예측은 웬간하게 엇나가는 법. 금요일 오전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내린다는 예보와는 달리 토요일 아침이 되자 말간 햇살과 함께 세상이 샛노랬다. 더이상 눈이 쏟아질 기미는 없었다. 특정 지역에서는 눈이 나뭇가지를 꺾고 꺾인 가지가 전기줄을 건드려 불과 조명이라는 문명이 사라졌다. 내가 사는 지구는 둘로 갈라졌다. 차가운 바닥과 금빛 하늘… 니모는 강렬하게 왔다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물었다.

니모가 떠나고 난 뒤, 사람들은 축제를 벌였다. 브라질에서 열정의 카니발이 열릴 적에 뉴잉글랜드에선 눈삽 축제가 열렸다. 텍사스는 화씨 75도로 달구어진 땅에서 새싹을 피워올릴 적에 뉴잉들랜드에선 제설기 홈통이 눈을 빨아들여 공중으로 흩뿌렸다. 꽃이나 깃발처럼 사람들은 각삽에 설삽을 들고 막힌 길을 뚫고 묻힌 차 바퀴를 드러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쏟아져 나와 하얀 주차장은 하얀 입김으로 펄럭거렸다. 찌뿌리고 웃고 떠들고 영차, 힘을 주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삽에다 눈을 퍼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랐다. 사람들은 빨간 파카, 초록 파카, 잿빛 파카, 하얀 파카… 파카가 세상의 모든 외투인 듯 파카를 입고 있었다. 빨간 장화, 초록 장화, 재색 장화, 검정 장화… 장화가 세상의 모든 신발인 듯 장화를 신었다. 빨간 모자, 초록 모자, 잿빛 모자, 노란 모자… 모자가 머리카락 인 듯 얼굴 위 쪽으로 모자를 덮어씌웠다.

예의 바른 니모, 만만찮은 니모, 무거운 니모가 왔다간 자리엔 사람 키보다 높은 설봉분이 생겼고 밤과 낮의 밑바닥은 미끈덩 거렸다. 허옇고 하얗고 희뿌연하고 희멀건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