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때문에

긴 플라스틱 용기에 어제 만들어 놓은 김밥이 세 줄 담겨있다. 참기름 먹어 축축해진 김밥, 시간을 먹어 쭈글쭈글해진 김밥, 할머니 살가죽처럼 출렁출렁한 김밥…

밥 김을 왠간히 쏘이고 난 후 김발 위에 올렸으니 참기름을 너무 넣은 탓이 아주 쬐금, 남편이 잘 썰어 보겠다고 들인 물공덕이 왕창일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만 칼에 물을 많이 묻혀야 잘 잘라진다며 한 번 썰 때마다 칼머리를 대접물에 푹 담근 후 손잡이를 번쩍 세워 물방울이 반대쪽 날 끝으로 구르면 댕강댕강 칼질을 했다. 속으로 애가 탔지만 그런 시츄에이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행은 애써 외면하는 것 뿐이다. 아침부터 일이 많아 포화노동 상태가 된 나는 눈 딱 감고 돌아섰다.

남편한테 일 시켜먹으려면 잔소리를 삼가해야 하는 것은 철칙이다. 아마도 아내의 잡다한 지시대로 네, 네, 선생님, 하며 따르는 남편이 있다면 그 사람이 특이체질이지, 내 방식대로 할테니 내 품 쓸려면 쓰고 말려면 마쇼,라는 태도를 취하는 다수의 남편들은 정상일 게다. 우리 남편은 입술을 뾰족히 내밀고 팩, 토라지는 공법을 사용한다. 수 틀리면 손길을 딱 멈추고 소파로 가서 벌러덩 눕거나 애꿎은 마우스를 잡는다. 그 편이 이 편보다 백배나 속이 터진다. 그러니 외면하는 선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윈윈win-win 병법이 된다.

가사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남편들이 집안일 하는 품새를 볼 때면 발굵은 소쿠리로 좁쌀 고르는 심정이 되지만 그렇더라도 된장 옮겨 담 듯 꾹꾹, 하고픈 말을 눌러놓아야 탈도 없고 일도 진행된다. 초심자가 어찌 베테랑과 같을 수 있겠는가. 정 못 참을 것 같으면 먼저 옆 집 아들 가르치듯 사분사분 달래보고 그 방법이 먹힐 듯 싶지 않을 때 과감히 돌아서야 고수다. 두 번 말해서 들을 남편이라면 한 번 말할 때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진리를 안다고 만고땡이라 믿는다면 사이비종교를 신봉하는 급의 오류임을 누설한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알고도 모르는 척 행동하는 망령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어제 저녁의 분분한 노력으로 마련된 김밥이 있어서 아침엔 못 먹어도 고고처럼 배가 불렀다. 출근 시간이 촉박했던 남편은 차에서 집어 먹을 수 있게 용기에 넣어가고, 모처럼 런치백을 준비하고 싶었던 막내는 김밥에 주먹밥, 치즈와 크래커까지 넣어 달랑달랑, 들고 갔다.

울 막내에게는 등하교 메이트가 있는데 부지런한 그 아이는 늘 우리집에 일찍 와서 몇 십분을 놀다 학교에 간다. 늘 이것저것 식탁에 있는 것을 권해도 안 먹겠다던 아이가 막 나가려고 신을 신다가 김밥을 발견하고는 그거 스시야? 하고 막내한테 물었다. 지네끼리 스시 어쩌고 하기에 김밥이라고 말해주려는데 스시, 와 나 스시 좋아하는데 우리 엄마는 never ever 만들어줘. 하다못해 김도 안 사줘… 라고 투덜대며 부러운 눈길로 김밥통을 훑었다. 먹을래?하고 물었지만 문 여는 소리에 묻혀버렸는지 아이들은 그냥 밖으로 나갔고 나도 허겁지겁 그 뒤를 쫓아갔다. 그 집에 좀 갖다줄까, 생각이 들었지만 통에 든 김밥의 모양새가 생각나서 다음에 만들면 한 접시 갖다줘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이거 스시 아니고 김밥입니다,하면서…

내겐 김밥하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기독교 재단이라 1주일에 하루 아침은 채플을 들어야 했다. 시작 시간이 이른 탓에 아침밥을 거른 날이 많았다. 좋은 말씀을 듣고 정신은 배가 불러도 그 만복감은 잠깐, 불뚝불뚝 성을 내는 육신의 배고픔에 금새 生의 苦를 느꼈으니 역시 철이 덜 여문 시절이었다. 학기 초에 채플을 마치고 강당을 빠져나오는데 동아리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자취를 하고 있었으니 나보다 더 아침을 굶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 친구가 매점에서 뭐 사먹고 들어가자는 제안을 했다. 아마 배가 고프지 않았더라도 나는 따라갔을 것이다. 친구따라 강남 가는 시절이었으니까. 지금처럼 시간을 쪼개 쓸 필요 없었던 그 시절은 철은 덜 소유했을지라도 더 부자였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시간의 부자, 마음의 부자!

그때 친구와 나는 김밥 한 줄씩과 흰우유 한 팩씩을 샀다. 이후 춥든 덥든 바람이 불든 비가 내리든 김밥과 흰우유를 그 친구와 함께 먹었다. 비오는 날에는 어딘가 건물 내로 들어갔지만 나머지 날들엔 벤치나 바위 위에 앉아 김밥 한 덩이 씹고 우유 한 모금 마시며 참새처럼 속도 채우고 수다도 채웠다. 봄이면 특히 자목련, 흰목련이 흐드러지고 철쭉과 개나리, 벚꽃과 진달래가 질새라 향을 내뿜던 교정(참 교과서적인 봄꽃들이다), 가을엔 내 손바닥만한 단풍이 금잔디처럼 보드랍게 드러누웠다. 꽃향도 마시고 우유도 마시고 단풍도 즈려밟고 우정도 즈려 다지던 시절에 우리는 꽃보다 빛나는 뺨을 가졌으리...

아침 상으로 김밥 한 줄 내놓고 그 시절 생각하면서 김밥과 우유를 우물거리는데 문득 그 젊음 그리워져 눈이 간잔지런해져 간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김밥 때문에 추억여행 하다가 맥없이 아줌마 가슴에 바람이 인다, 아 김밥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