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서…

군데군데 산재한 눈둔덕에 겨자빛 햇살이 파고든다. 깡깡하게 얼어붙은 눈얼음이 땀처럼 번들번들한 수포를 터뜨리고 쌉싸름한 꽃향이 사방팔방 퍼져있다. 이대로 봄이 열릴 것 같다. 봄 꽃이 피고 두터운 겉옷을 벗을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따뜻하고 멋스러운 스카프를 목에 감았을 때처럼 안도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꽃가루 알러지 중증환자인 나는 이번 해는 미리부터 단단한 예방책을 마련했다. 일단 쨍쨍한 햇살과 뽀송한 바람으로 겨울의 묵은내를 날리겠다고 창문을 활짝 열어제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꽃가루가 집 안을 점령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마스크를 쓰고 외출할 것이다. 미리 처방을 받은 스프레이를 잊지않고 아침마다 코에 뿌릴 것이다. 꽃가루가 세상천지를 점령하기 전에 약간의 약을 먹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이리라.

이런 생각들은 지난 시절의 아픈 경험에서 비롯된 교훈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특수한 처지에 놓인 자신을 파악하고 정신을 바싹 차려 살겠다는 결심에서 나온 지략이기도 하다. 나는 졸지에 기러기 엄마가 되었다.

남편의 직장문제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우리 부부는 귀향을 결정했다. 그것은 오래된 나의 염원이었고 남편이 결심을 하고 한국에서 일자리를 알아본 결과 원하는 직장의 문이 열려서 우리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흔들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미국땅에서 남편 없이 혼자 산다는, 감히 상상도 불가했던 일이 벌어지자 나는 아침마다 가슴이 스산하고 울렁거리는 이상 현상을 겪기 시작했다. 최전방에 파병된 전사의 마음이 이럴까, 단단한 집 벽이 허물어져 바람 속에서 잠을 청하는 난민의 심정이 이럴까… 자상하기로 소문난 남편이 담당해왔던 많은 일들을 혼자 해낼 수 있을는지… 두 아이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제대로 비와 바람을 막아줄 수 있을는지… 남편이 그리우나 두려움이 너무 커서 처음엔 그리움 따위 느낄 수 조차 없었다.

그리고 거침없는 현실은 나를 담금질 하기 시작했다. 며칠 걸러 폭설이 내리고,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어 이웃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데려오고, 앞 유리창에 낀 서리가 너무 단단해 겨우 구멍만 뚫어놓고 거북이 운전하고, 익숙치 않은 실무 처리를 하다가 빈 손으로 돌아오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엄마란 이름의 여인은 강해야 했고 하나씩 둘씩 꼬인 매듭을 풀어가자 이제는 아침에 눈을 떠도 입덧처럼 속이 울렁거리지 않는다. 겨울을 견디어내니 봄이 오고 있었다.

처음엔 당연히 아이들 학기가 끝날 때까지만 기러기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큰 아이가 10학년이다보니 한결같은 질문들이 건너왔다. 큰 아이는 어떻게 하나요? 네? 나는 큰 아이가 아직 미성년이고 또 서로 많이 좋아하는 언니와 동생이 떨어져 사는 일은 너무 슬픈 일이라서 다 함께 돌아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현실을 말씀하셨다. 그 현실은 대학진학을 위해 이 곳에 남는 것을 정답이라고 했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가족이 다 함께 살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한국에서는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일이 보통이지만 미국에서는 대학생이 되면 아이를 떠나보낸다는 개념이 상식적이고, 그것이 올바른 가치관처럼 정립되어 있다. 이미 십수년을 미국에서 살아 미국 관습이 밴 우리 부부도 그런 철학을 자연스럽게 지니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아이와 같이 한 지붕 밑에서 사는 그 18년에대한 간절함이 생겼다. 함께 둘러 앉아 저녁을 먹고, K팝스타를 보며 누가 잘했고 누가 멋지다는 수다를 떨고, 가끔은 싸우고 가끔은 흉볼 때 쌓여가는 잔정들… 그것이 주는 관계의 농밀함은 함께,라는 행위가 아니면 자라기 힘든 감정이다. 아이가 판이한 두 문화를 접하면서 다양한 체험을 하고 사고하며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큰 배움을 얻지 않을까… 주어진 것의 안이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목표를 위해 도전하는 것이 더 커다란 성취감과 자신감을 획득하는 기회가 되지는 않을까…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삶의 최종 목표인가? 가족이 함께 사는 일보다 그것만이 나은 선택이려나? 달랑 둘뿐인 자매가 언니는 미국사람, 동생은 한국사람으로 살아가기 십상인 미래의 갈림길이지 않은가.

요즈음 남편과는 별 일 없는 한 하루 한 번 스카이프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각자 할 일이 있는 상황인데도 스카이프를 끄지 말고 두라고 했다. 집에서 일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좋다고 했다. 겉으론 슬쩍 퉁박을 주었지만 마음은 하염없이 짠했다. 아빠는 가족이 그리운 것이다. 아빠도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인 것이다.

세상살이에 정답은 없다. 천갈래 만갈래 길에서 자신에게 더 소중한 것을 찾기위해 마음을 묵묵히 들여다 보는 일, 그리고 마음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충실히 걸어가는 일, 단순히 코 앞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를 내다보는 일, 그것이 인생의 정답이 되리라.

나는 오늘도 찬찬히 들여다 본다. 어느 길이 가족이라서 더 행복의 길이 될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