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적인 풍경들

14년 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내가 정말 미국에 있구나, 실감했던 곳은 공항내도 아니었고 피부가 다른 사람들에 둘러싸여 영어만 들리던 지하철 안도 아니었고 달려도 달려도 수목림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고속도로도 아니었다. 널찍한 운동장과 잔디밭 그리고 그 운동장에서 야구나 축구를 하는 아이들과 주변에서 딸,아들을 응원하거나 휴대용 피크닉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부모들… 그 풍경을 접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미국에 왔다는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 머리속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던 할리우드 영화의 장면이 그대로 나의 현재와 오버랩되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1999년 도미 전까지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는 광경, 그보다 더 미국적일 수 없는 장면에 비로소 이 곳이 평화와 안전이 있는 지구촌 부국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도미 전에 미국이란 나라를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길거리를 걷는데 난데없이 총알이 날라오거나 차선을 넘나들며 거칠게 질주하는 차들의 쫓고 쫓김이 곳곳에서 일상으로 일어날 것 같았던 것이다. 우습지만 할리우드 액션 영화 탓에 형성된 선입견이었다. 14년 전, 어느 햇살 좋은 가을 오후에 목도한 그 장면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뿐아니라 이후로도 어딜 가나 접할 수 있는, 내겐 가장 미국적인 풍경이 되었다.

미국, 하면 생각날 또 한가지 장면은 조지아의 여름풍경일 것이다. 5월에 시작해 9월은 돼야 끝나는 긴 여름동안 화씨 100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날씨가 이어지는 탓에 조지아의 왠만한 주택가에는 필수적으로 수영장이 구비되어 있었다. 한 울타리 내에 몇 십 채에서 몇 백 채가 들어있는 Subdivision이 일반적인 주택형태였고 주민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용 수영장은 그래서 규모가 컸다. 그리고 여름이면 수영장에서 마을별 수영대회가 열렸다. 정확히 말하면 subdivision별 대항 수영대회였던 것이다. 늦은 오후에 딸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에 갔던 한여름, 길목마다 차들로 빽빽해서 대체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길을 걷는데 수영장쪽에서 함성과 응원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각 레인별로 아이들이 줄을 서고 공기총 소리에 맞춰 개구리처럼 퐁당거리며 물 속에 뛰어들던 아이들… 주변에는 핫팬츠 차림의 부모들이 발을 콩콩거리며 응원을 하기도 하고 늘적하니 해변 의자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기도 했다. 어린 동생들은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스낵을 오물거리며 한여름의 잔치 속을 마음껏 뛰어다녔다. 비록 그 날 우리는 수영을 할 수 없었지만 그 미국적인 풍경에 마음을 쏙 빼앗겼던 건 지극한 행복이었다.

내가 매우 감탄한 모습중 하나이면서 한국과 극히 대조를 이루는 미국적인 풍경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상을 주는 방식이었다. 학교에서 무슨 상을 어떤 학생에게 주는 지 학부모는 물론 전교생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직접 상을 받지 않으면 그런 상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어떤 학부모는 그런 상은 없다고까지 선언했다. 그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시상식 때, 상을 받는 학생과 학부모만 초대하여 행사를 치루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는 집으로 통보를 하면서 상장을 우편으로 보낸다. 수상식도 없이 그것으로 끝이다. 시시해서일까란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시시하다기보다는 정부차원에서 극소수에게 주는 상이므로 학교 행사에 포함하지 않을 뿐이었다. 처음엔 무슨 이런 경우가 있는가, 했다. 잘해도 그것을 치하하고 격려하는 제도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컬쳐쇼크였을 뿐이다. 상을 받는 소수의 아이들보다는 받지 않는 다수의 아이를 생각해주는 깊은 마음씀씀이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아이들을 순위별로 매기지 않는 문화,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품으며 자랄 수 있는 환경, 체조를 잘 하니까, 예의 바르고 친절하니까, 봉사정신이 투철하니까 자신은 매우 특별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문화… 바로 그런 세심한 배려가 이런 문화를 자리매김하게 하지 않았을까...

미국 학교에서는 특정한 경우엔 결석을 권장하기도 한다. 감기를 비롯해서 장염이나 이 등 옮기는 모체를 가진 경우는 다 포함된다. 아파도 학교에 가고 일을 한다는 일률적인 성실성을 다르게 조명하면 다른 이에게 병을 옮기지 않기위해 결석하는일은 더 친절한 행동이라는 상관관계로 드러난다. 이것은 자신이 존중받고 피해를 얻지 않고싶은만큼 타인을 배려하자는 관념에서 이루어진 관습일 것이다.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극히 미국스러운 풍경이다.

사실, 미국은 땅덩이가 너무 넓은 탓에 미국적인 풍경이 곳곳마다 다르다. 주마다 타운마다 심지어 학교마다 다른 제도와 환경을 가져서 이것이 미국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생사가 그렇듯이 그저 개인적 체험에 불과할 뿐이다. 공교롭게도 우리 가족은 남부, 서부, 동부지역에서 살아보았다. 적응하느라 힘이 들었겠지만 덕분에 견문도 조금은 넓어졌을 것이다. 반면 많은 미국인들이 고향 인근을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남부인들은 남부에서만 동부인들은 동부에서만 중부인들은 중부에서만 살아가는 많은 경우 때문에 지역색이 형성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느낀 지역색을 간단히 그려보자면 남부는 노예를 부리며 살아온 조상의 땅답게 현재에도 인종차별의 뿌리가 잔존한다는 느낌이 짙다. 영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들이 무턱대고 무시를 당하는 황당한 곳이기도 하다. 더운 날씨로인해 느리고 여유롭고 약간은 태만한 곳. 하지만 따뜻한 날씨와 값싼 물가가 매우 매력적인 지역이다. 서부는 좋은 날씨와 광활하고 드라마틱한 대자연을 품은 땅답게 사람들이 호탕하고 외향적이며 여유롭고 다인종이 섞여서 한 나라를 이루어 산다. 이민국가 정부가 선도하고 지향하는 믹싱 팟mixing pot의 느낌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반면 동부는 긴 겨울로인해 꽤 폐쇄적이면서 독립적이면서 차가운 인상이 강력한 곳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사귐이 깊고 따스하며 민주당이 대세인 지역답게 자유 정신과 개성을 추구하고 지식인들이 타지역보다 많이 모여있기도 하다.

14년 전, 한국문화의 영향을 받고 자란 내게 한국과는 다른 미국만의 독특한 풍경이 뚜렷이 구별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14년이 지난 지금은 그 미국적인 풍경이 나의 풍습이 되어 버렸다. 세월의 힘이란 그런 걸거다. 이제 다시 한국의 일상에 색다름을 느끼게 될 미래… 그 미래의 나날들 속에서도 이 미국적인 풍경들은 영원히 보물로 남게 되리라.

평화롭고 세련된 보스톤 인근이 내가 도미 전에 상상했던 바로 그모습으로 변모한 요즈음이다. 우리집에서 불과 2,30여분 떨어진 곳에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참변이 일어났다. 하지만 먼 훗날 내가 떠올릴 미국의 풍경 안에는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14년간의 추억과 경험이 이 일은 이례적임을 말해 주어서 다행이다. 참변의 희생자들을 보면서 진심으로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유유히 흐르는 찰스강변뿐 아니라 전쟁위기에 내몰렸던 한국을 비롯 지구촌 어디서든 평온과 화해와 안정만 깃들면 좋겠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