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에대한 개똥철학

떡볶이와 군고구마, 4색 콩샐러드와 메론을 먹는다. 낮에 밥을 먹은 탓에 저녁이 간소해졌다. 서른까지는 삼 시 세 때 밥을 먹는 일이 아무렇지 않았는데 미국 온 후로 밥은 두 끼만 먹으면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는 한 끼니 먹으면 다음 끼니엔 밥이 먹히지 않는다. 식습관이 바뀌었다. 우리 딸들은 낮에 밥을 내면 런치에 왜 밥먹어요?하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heavy lunch, light dinner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막내는 Yah, light dinner!하며 좋아한다. 과일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생각때문인 것 같다.

두 딸과 나, 이렇게 세 여자가 저녁을 먹으면서 수다를 떤다. 자매들끼리 말 할 때는 영어로 하고 엄마하고 말할 때는 한국어로 한다. 영어로 말 할 때는 내키면 끼어들지만 어떨 땐 혼자서 딴 생각을 한다. 하지만 한국어가 나오면 바로 정신을 차리고 대화에 응한다. 소리는 들리지만 귀로 담지 않을 수 있는 기능이 점점 발달해 간다. 가끔 막내는 나한테 영어로 말을 하는데 그러면 내 귀는 슬그머니 닫힌다. 그럴 때면 엄마, 내 말 안 듣고 있지요?라고 따지듯 묻는다. 나는 그러니까 한국말로 해야지,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면 막내는 기분에 따라 두가지 반응을 보인다. That’s why mommy should study English.라고 하거나 기꺼이 잉글리안(잉글리시+코리안)으로 바꿔 말해준다. 우리 막내는 모자도 자켓도 장갑도 양말처럼 신는다. 모자는 쓰고 자켓은 입고 장갑은 끼는 거야… 아무리 말해도 그냥 신는다. 내가 내 몸에 적응된 언어를 편애하는 것처럼 우리 막내도 wear 하나로 통하는 편리함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 엄마에 그 딸이라 나는 이해가 된다.

언니가 영어시간에 들은 스토리라며 이야기한다. 한 독일 가족이 미국에 왔다. 독일 엄마는 여름이 되자 미국 엄마들이 아이들을 써머캠프에 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기도 아이를 써머캠프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가방에 이것저것 챙겨서 아이와 함께 캠프 사이트를 찾는다. 텐트를 쳐주고 음식 가방을 내려놓고 며칠 후에 데리러 올게,라고 말한 후 엄마는 바이를 고한다. 그 대목에서 막내와 내가 우하하, 웃는다. 독일 엄마는 캠프를 철썩같이 캠핑이라고 믿은 것이다. 옛날 생각이 났다. 나 또한 그랬었다. 이후 아이는 혼자 텐트에서 기거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주변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아침에는 큰 소리로 바이, 맘 이라고 외치면서 텐트에서 나오고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바이 대드,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우하하하, 저녁 식탁에서의 두 번째 웃음이 거나하게 터진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된 아이와 내 문화에 지배된 엄마가 보인다.

이번에는 막내가 말한다. 막내네 학교에서는 switch math라 하여 수학시간에 반을 바꾼다. 세 학급의 아이들이 각자 레벨에 맞추어 담당 선생님 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막내는 자기네 담당 선생님이 the meanest teacher라고 투덜댔다. 항상 아무나 지적해 칠판에 문제를 풀게하는데 못 풀면 그걸 왜 못 푸냐고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설명할 때 자신의 감정을 반영해 말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나는 항상 그려려니 하고 듣는다. 어느날은 막내가 답은 아는데 풀이과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유인 즉슨 문제가 어려웠는데 모두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까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자 선생님이 그러면 답을 어떻게 알았냐고 또 소리를 질렀다나, 어쨌다나… 그 말을 듣고 언니와 내가 푸하하, 웃는다. 광경이 눈에 보이듯 그려졌기 때문이다. Stage fright! 웃다가 언니가 그렇게 놀린다. 일단 놀리고 난 언니는 말한다. 그래서 나는 쉬운 문제일 때 막 손을 들어서 먼저 풀어버려. 그러면 어려운 문제일 때 아무도 손을 안 들어도 선생님이 나를 포인트 하지 안 거든… 나꼼수가 아니라 언니꼼수였다. 그 mean한 풍토에 잘 적응한 언니의 생존법이 보인다.

딸들은 막 구워낸 고구마가 맛있다고 감탄하고 메론이 시원해서 좋다고 했다.  4색 콩샐러드도 떡볶이도 싹싹 비워냈다. 딸들은 여느 때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여느 때처럼 서운해졌다. 저녁 잘 먹고 잘 웃던 나는 또 이상한 여인이 되었다.

남편의 빈자리 때문이었다.

옆에 앉아서 같이 웃고 떠들어야 할 아빠가 없는데 아이들은 전혀 결핍이 없어보인다. 아이들은 안전하게 울타리를 쳐주고 사랑만 채워주면 그 안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는가 보다. 하기사 형식보다는 마음간의 믿음이 진정한 사랑이겠다. 하지만 17년동안 내내 붙어살던 남편의 빈자리에 나는 아무래도 적응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부는 한 몸이요, 자식은 1촌 이란 말이 생겨났는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 촌수, 참 잘도 정했다.

적응이란 낯 선 것을 내안의 것과 바꾸어 채워 넣는 것. 어떤 것이든 더 많이 더 오랫동안 쌓아 놓은 어른들은 그래서 아이들에비해 그 순발력이 떨어지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