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여행기

온 몸에 잘 익은 수박색으로 부풀어오른 반점들이 수두룩하다. 막내가 세보더니 28군데나 된단다. 밤이면 간지러워서 잠을 설치게 하는 거대한 반점 군집은 남부 모기들의 피빨기 축제로인한 잔재들이다. 몸집도 작을 뿐더러 윙윙 소리도 내지 않는 남부 모기들덕에 플로리다에 다녀온 진한 증거가 몸 곳곳에 박혔다.

올랜도에서 나흘, 마이에미에서 하루, 키웨스트에서 이틀 머무는 동안 보스톤에는 100도를 치닫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나는 막연하게, 예를 들어 북부의 기온이 100도면 남부는 100도를 훨씬 상회할 거라 예상했었는데 그 생각은 맞지 않았다. 미국은 땅덩이가 하도 넓어 북부와 남부와 서부가 각각 다른 기류의 영향을 받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부러운 거대함이다.

올랜도에서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아일랜드 오브 어드벤쳐만 방문했는데 막내의 숙원이었던 해리포터관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멋져서 몸 마디마디가 뻑적지근해진 고충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거대한 성(Hogwarts:해리포터 학교)안에 준비된 놀이기구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내내 빗자루를 탄 해리포터와 함께 하늘을 날게 만들었다. 속도감뿐 아니라 아슬아슬하게 장애물을 비껴나갈 때의 스릴감, 스펙터클하게 펼쳐진 장광경 등은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놀이기구중 백미이지 않을까라는 감상을 연거푸 하게 만들었다. 나는 진심으로 매료되어 그 엄청난 규모와 기술과 기발한 아이디어에 박수를 치고 떠나왔다.

올랜도를 출발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안 문득 들었던 생각은, 미국도 한국처럼 동해, 서해, 남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광대한 땅덩이는 동해로 대서양을, 서해로 태평양을, 남해로 대서양과 멕시코만을 품은 것이 달랐다.

미동부의 바다는 모랫바닥에 배를 깔고 하염없이 파도소리를 듣고싶게 만들고, 서부의 바다는 서핑을 하고 싶게 하고, 남부의 비취색 물은 그 결고운 살결로 인간의 전신을 끌어당긴다. 고만 퐁당 물에 빠지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물을 무척 좋아한다. 가끔 전생에 인어였거나 물풀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데 왜냐하면 물에 들어가면 꼬리를 팔랑이는 인어나 결따라 흔들리는 수초처럼 춤을 추게되기때문이다. 몸치인 내가 물 밖에서 춤을 추면 눈을 감고 싶어지지만 부드럽고 온화한 물결에 휩싸인 손가락이 우아하고 리드미컬하게 팔랑거리는 걸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가 나온다. 그렇게 좋아하는 물중에서도 플로리다 남부 바다만큼 푸근함을 전해주는 바다는 드물었다. 고향 할머니 눈길처럼 한없이 따땃했다.

팜비치는 주변이 참으로 럭셔리하다. 흡사 LA의 비버리힐즈를 떠올리게 하는 저택들이 야자수림 담장을 사이에두고 널찍하게 늘어서 있다. 비치도 좋지만 동네구경을 하는 맛도 일품이다.

마이에미비치는 숫처녀처럼 정결하고 단아한 옥색물결을 품고있다. 녹말가루같이 흰 모래가 펼쳐진 Camel비치(CA), 절벽과 수림의 풍경이 매혹적인 Ogunquit(메인), 반질반질한 자갈에 비치빛 물결이 일렁이는 Nice(프랑스), 넓디 넓고 서핑족의 천국인 Malibu(LA)… 가슴이 펴지고 깊은 평온과 영혼의 환희를 느끼게 했던 수많은 비치중에서 Miami만큼 내 눈길을 붙잡고 꼼싹 못하게 홀린 곳은 없었다. 물과 수평선과 하늘의 일체와 눈마주침 하느라 그 주변에대한 기억은 희미해져 갔다.

마이에미에서 국도 1번을 타고 3시간여를 달리면 키웨스트가 나온다. 키웨스트는Florida Keys중 가장 끝단에 위치한 섬이다. 본토에서 키웨스트까지 가는 도중에는 Long Key, Deer Key, Indian Key…등의 이름이 붙여진 섬들이 있고 그 사이사이를 잇는 다리중에 그 유명한 세븐마일 브릿지를 지나게 된다. 키웨스트라는 지명은 인골이 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스페인어의 ‘카요웨소Cayo Hueso(인골의 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위키백과사전 참조). 영어화의 과정에서 Cayo가 Key로 Hueso가 West로 변화되었다고 추정한다는데 남편과 내가 그 사실을 알기 전에는 막연히 keys중 가장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추정을 해보기도 했다.

키웨스트는 길이 4마일, 너비 2마일의 섬답게 무척 아담했고 섬 자체가 vacation의 도가니같은 느낌이었다. 한번정도 와보면 족할 것 같은 이 마을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는 헤밍웨이의 집이었다. 작고 아담한 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그의 작업실이다. 작은 원탁과 아담한 나무의자, 타이프 라이터, 글쓰다 피곤하면 누워서 쉴 수 있는 소파, 붙박이 책장에 꽂혀진 책들과 간소한 화장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소담한 공간은 사진에서 표현되지 못하는 안락함과 푸근함이 존재했다. 그 곳에서 나는 아침이면 본채와 연결된 다리를 건너와 이 작은 의자에 허리를 내리고 미간을 좁히거나 눈을 부릅뜨거나 혹은 눈물을 흘리거나 방귀를 뀌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오후의 죽음’ 같은 작품을 집필하고, 유산자와 무산자를 구상하던 세기의 잘생긴 작가를 떠올렸다. 그는 언뜻 활기차고 다양하고 버라이어티했던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살이라는 수단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그의 가계에 많은 친인척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다. 네 번의 결혼, 낚시와 사냥, 전쟁과 글쓰기, 여행과 참여와 사랑 등으로 점철된 미국의 위대한 작가의 삶을 반추하느라 등에서 뭉친 땀이 흘러내려 허리춤을 적시는 것도 나는 인식하지 못했다.

묻기 좋아하는 막내가 또 물었다. 플로리다 여행중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그 질문에 저와 언니는 올랜도, 엄마는 마이에미 비치, 아빠는 키웨스트로 가는 다리라는 답이 나왔다. 하지만 실은 오랫동안 들여다보느라 모기떼의 습격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헤밍웨이의 작업실이야말로 잊을 수 없는 장소가 될 듯 하다.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염원을 기도하던 내 비밀스런 모습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