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들어온 이후 – 큰 아이의 변화

한국에 들어오는 일로 나는 장장 4개월이란 시간동안 꼬박 고민을 해야했다. 아마도 선택의 여지가 많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더 고달퍼진다.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고 그 알 수 없는 여러 갈래 중 하나를 택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일의 결과가 예측한대로 나온다면 무슨 걱정일까. 인간의 한계중 하나는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는데 있으니… 나 역시 아무리 고민을 해봐야 뚜렷한 청사진이 안 그려졌다. 

법륜 스님은 ‘선택이 어려운 것은 손해는 안 보고 이익만 바라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럴 땐 아무 쪽이나 결정하고 그에따른 손해만 감수하면 된다고 하셨다. 심히 공감가는 말이라 내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므로 그럴 경우에는 더 가치 있는 쪽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개월이란 시간동안 엎치락뒤치락 쉬 결정이 나지 않았던 이유는 주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너무 컸고, 고민의 중심이 내 자신이 아닌 큰 아이인 데다 그 아이의 장래가 걸려있고 정작 장본인은 엄마와는 다른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또래 아이들이 가족보다 친구를 우선시 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목표로 하는 대학을 위해 열심히 달려온 지난 시간들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염려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가족의 소중함과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면 길은 열릴 것이라는 진리로 딸 아이를 설득했다. 협박도 들어갔다. 적어도 만 18세가 되기 전까지는 부모만큼 자식을 최선으로 보살피는 사람이 없으니 그 판단을 믿어주어야 한다고… 그리하여 파과(破瓜) 16세인 큰 아이는 사랑하는 친구들과 허구헌날 이별을 하고 영어나라를 떠나 한글나라로 건너왔다.

미국에서 10학년을 마치면 한국에서는 고 1을 끝낸 셈이 되지만 3월부터 새학기가 시작되는 한국의 학제상 큰 아이는 8월에 1학년 2학기로 편입이 되었다. 경제적 부담이 제일 큰 이유였지만 어쨌거나 한국 시스템을 아는 것도 좋은 경험일 거란 생각에 국제학교가 아닌 일반고등학교를 선택했다. Easy way보다는 challenging한 환경이 아이를 크게 할 것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은 진리이다. 젊어서 고생하면 생각도 성숙해지고 인생에서 부딪는 난관을 헤쳐나가는 노하우도 터득하게 된다. 어려움을 극복하면 성취감이 생기고 자신감도 붙는다. 그러니 사서라도 하라지 않는가. 보호 속에서만 자란 내 딸들에게 이런 커다란 도전의 관문이 주어진 것에 나는 감사한다.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짠했지만 그러는 한편으로는 설레었다. 한국 시스템에 적응을 하더라도 혹은 못 하더라도 여러가지를 느끼고 배울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그 두가지 길 중 어느 쪽도 실패가 아니라고 말해 줄 것이다. 단 최선을 다하는 것만은 잊지 않도록 독려할 참이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딸아이를 두고 염려하신 이유는 대학때문이었다. 미국에서조차 (미국인) 엄마들이 고등학교를 대학을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는 것을 듣고 놀란 적이 있는데 그건 어쩔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건국 초기당시에는 학자나 정치인보다는 오히려 생필품을 생산하는 사람이나 기반이 더 소중했다. 예를 들면 옷을 대량생산하기위해서는 재봉틀이 필요했는데 영국에서 재봉틀 반출을 철저히 금지했기에 재봉틀 조립기술자는 대통령 이상으로 중한 존재였다. 농어임부는 물론이고 배 만드는 사람, 연장 만드는 사람, 무기 제조자 등도 국가의 기반을 이어가는데 필수 요소였다. 대학에 가서 좁고 새로운 분야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사고의 팽대는 그 시대 사회 전반적인 추세였다. 그것이 이어져 몇 십 년 전만해도 미국에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횡횡했었다. 그 현상은 희소성의 법칙이었다. 필요한데 없으면 가치가 치솟는 법칙… 하지만 지금은 역사가 오래된 한국처럼 미국조차 한 나라에 오직 하나뿐인 대통령을 대적할 직업군은 없다. 그만큼 모든 분야에 사람들이 차곡차곡 공급이 되었다. 전문성을 띄지 않는 직업군은 경기가 나빠져 일손이 필요없게 되면 쉽게 실직을 한다. 이제는 전문성을 띄어도 안정권이란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스펙쌓기가 생존권처럼  인식되기 시작했고 대학은 그 한가운데 서있다. 대학중에서도 어떤 대학을 졸업했느냐, 대학에서 어떤 스펙을 쌓았느냐가  취업 성패의 관건이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재능을 소유했는가를 간단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이력서에 나열되는 그 한 줄 한 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 진의도 모르고 그저 스펙쌓기에만 연연해 하는 것은 아닌지… 쌓은 스펙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는 무관심한 채 말이다. 실은 무언가를 잘 할 수 있는 사람, 배운 내용을 활용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 모르는 사실을 캐내 밝힐 줄 아는 사람, 그리하여 인간의 삶을 복되게 하는 바로 그 리더십을 원하는데 말이다.

결론은, 중요한 것은 어느 대학을 나왔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질과 그 자질을 개발할 수 있는 동기부여와 환경이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고투하고 일어서는 법을 터득한 인성과 감성이야말로 지식이라는 붓을 쥐었을 때 마음껏 새롭고 기발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질을 갖게 될 거라는 게 내 지론이다. 좁은 영역만을 연구하고 그것이 다인줄 아는 한계야 말로 위험하다는 발상이 제기되고 있다. 지식은 깊어지면 좋으나 절대 좁아서는 생존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 융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밑바탕은 다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아이의 그릇이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그 안에 다양하고 색다른 것을 넣어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일 거란 착안은 그래서 하게 되었다.

현재, 파과 16세인 큰 딸은 학생을 먼저 생각해주시는 좋은 이념을 가진 학교에서 받아주신 덕에 탱크탑과 훌립훌롭 대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닌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나는 한국에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절로 했다. 참 이상한 이유지만 정말 그렇다. 여담이지만 가슴선이 보일락말락하는 탱크탑을 나는 어지간히 싫어했나보다. 이젠 파티 드레스로 싸울 일도 없게 생겼다. 그런 갈등 대신 야간자습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딸아이를 포옹으로 맞이하며 수고했다고 말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전신거울에 뒷모습을 비춰보며 ‘엉덩이가 납작해 진 것 같아’라고 찌징거리는 모습에 박장대소하며 웃는다. 그 한마디야말로 미국과 한국의 차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언급이고 내 딸은 그 다름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중인 것이다. 탱크탑과 핫팬츠에서 교복으로의 변신이 딸아이에게 줄 값진 영양분은 곧 한국과 미국을 잇는 교량이 될 거라는 기대를 그래서 나는 가슴에 품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