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키즈들은 쫌팽이야요

아린이가 앙상한 두 다리를 사다리처럼 벌리고 앉아 공기연습을 한다. 여물지 않은 green bean 다섯 개를 묶어놓은 듯 엉성해 보이는 손가락 사이로 공기알들이 튀어오른다. 손 등 위에 제대로 안착하는 건 없다. 모두 옆으로 새거나 앞으로 튕겨 나긴다. 엄마랑 할 때는 저도 민망한 지 피식피식 웃으며 아이그~~ 못 해, 재미없어~ 하더니만 혼자 연습할 때는 상상놀이를 하면서 콩콩 떨어지는 공기알을 쫓아 콧노래도 부르며 엉덩이를 질질 끌고 옮겨다닌다.

아린이가 상상놀이 하는 모습을 보면 어릴 적 내가 떠오른다. 나도 꽤 오랜 시간동안 가상의 세계를 즐겼다. 골목을 걸을 때면 여기저기 고무줄이 쳐져 있다는 상상을 하고 허리를 굽히거나 다리를 쳐들고 또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을 중얼대면서 빙그르 돌곤 했다. 이제 생각하니 누군가 그 모습을 보고 가관이다~ 했겠다. 엄마 몰래 갈망하던 마론인형을 사촌언니한테 500원에 사서는 인형과 대화를 하며 머리를 묶어주거나 옷 입히기를 5학년때까지 했다. 걸음마를 늦게 떼는 아이가 있 듯 우리 모녀는 상상놀이를 오래하는 유전자를 가진 모양이다.

지금 아린이는 친구들과 공기시합하는 상상놀이를 하고 있다. 공기놀이도 세상물정처럼 업그레이드가 되어 있었다. 보통공기, 천재공기, 바보공기, 수정공기, 서커스공기, 딸기공기…  마켓에 갔을 때처럼, 신선한 아이디어가 듬뿍 들어간 갖가지 공기놀이를 대하면서 감탄도 나오고 씁쓸함도 맛본다. 씁쓸한 이유는 신개발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현사회의 풍토가 떠올라서일 것이다. 공기는 고무줄과 함께 내 어릴적 여자애들의 양대산맥 놀이었는데 지금은 공기만 살아남았다. 고무줄 놀이는 발전 가능성이 없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한 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날려주던 실력을 복원시켜 왕년에 공기 쪼매 했다고 뻐기기엔 내 영역이 무지하게 협소해 졌다.

아린이의 공기연습은 한국사회에 적응하기위한 피나는 노력중에 하나다. 아, 재미없다, 하면서도 친구들이랑 함께 놀기위해 연습을 한다. 사람은 뭐든 잘 해야 재미를 느끼는 법이다. 해도 안 되는 일에는 일단 흥미가 사라진다. 찾다보면 무언가는 재미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제 적성인 것이다. 적성은 아니지만 해보려고 노력하는 일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분명 목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린이는 같이 놀고 싶은 친구들이 공기놀이를 좋아하니 저도 열심히 노력해서 그 무리에 끼어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기를 다루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다. 하고자 하는 일에 재능이 없다면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엇이든 적성에 맞아야 능률이 오르는 법이니까. 아무튼 아린이는 조만간 이 갈등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을 것 같다. 인생은 그렇게 배워나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린이는 한글 익히기와 한자 배우기(自意지만), 급식을 남기지 않고 먹기, 우유 빨리 마시기, 매운맛에 도전하기, 혼자서 찻길 건너기 등등 수많은 새로운 국면을 맞닥뜨리고 있다. 정글처럼 예측이 불가한 새 세상에 들어와 하나씩 하나씩 스테이지를 건너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재미있는 스테이지도 있다. 혼자 마켓에서 물건 구입하기, 친구들이랑 같이 동네 탐방하기, 자유로이 동무와 하교하기…

물론 아린이는 미국이 그립다고 한다. 선생님, 친구들과 이메일이나 페이스 타임 등으로 열심히 연락도 주고받는다. 울며불며 이별한 햄스터도 잘 챙긴다. 그러면서 초등 학교 알림장에 씌여있는 모든 사항을 꼬박꼬박 확인하고 이행한다. 하루에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커버하며 살아가고 있다. 작은 아린이의 큰 일상이다.

아린이의 고충은 영어를 잘 해도 언니처럼 그것이 부각되어 부러움이나 질시를 받는 대신에 한국말에 능하지 못하고 한국 실정을 모르는 쪽에 더 초점이 맞춰진다는 점이다. 귀국하기 전, 나는 많은 분들의 염려와는 반대로 언니 보다는 아린이가 살짝 걱정이 된 적이 있다. 단순히 학업성취 면에서 보자면 언니가 힘들겠지만 정서나 인성적으로 미숙한 어린이들의 세계가 조금 더 난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언니의 학업문제는 스스로 극복해야할 문제지만 아린이의 환경은 제 혼자 컨트롤하기엔 불가항력이 크다. 미국에서조차 도시냐 시골이냐 동부냐 남부냐에따라 아이들 환경이 다르고 그에따른 성향이 다르다. 하물며 미국과 한국사이라야… 게다가 요즈음 한국 아동들은 형제가 적어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학업성취에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타인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습성이 부족한 성향이라지 않던가…

어느날 아린이는 한국 친구들을 쫌팽이라고 말했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친절히 가르쳐주기 보다는 선생님께 물어보라고 한다거나, 작은 벌레에도 질색하며 소란을 피운다거나, 너 한국말 잘 못하니까 미국에서 살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 느낀단다. 그래서 아린이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선생님께 달려가고, 저도 벌레라면 아연실색하는 주제에 최대한 자제를 하고, 너는 한국에 사니깐 한국말 잘 하고 나는 미국에서 살았으니깐 English 잘 하고, 하지만 너도 미국에서 살 수 있고 나도 한국에서 살 수 있지,라고 말하며 살아간다.

아린이는 한국 친구들이 다 쫌팽이는 아니라는 사실도 안다. 공기를 좀 못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친구도 있고 교회에 데려가 주는 친구도 있고 선물 주는 친구도 있고 롤리폴리 트램플링장에 같이 가주는 친구도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의 세계란 친구가 90%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어떤 친구와 함께였느냐에따라 그 곳은 천국도 되고 적적한 절간도 된다. 미국에도 nice한 친구와 mean한 친구가 있었 듯 한국에서도 나와 맞거나 그렇지 않은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린이는 지금 globalize되어가고 있다. 아직은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하루하루 늘어가는 한국말 솜씨가 언젠간 쓴 추억을 달콤하게 녹여주리란 기대를 하면서… 엄마는 그 안쓰러움을 꾸욱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