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자구요!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올랐던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회상’이라는 책을 읽다가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만 대목이 있다. 이 책은 다년간의 병상 생활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과 사랑에 대한 성찰을 쓴 작가의 인생론인데 진지한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엉뚱한 에피소드라 그 재미가 더했다. 내가 먼저 실컷 웃고 남편한테 읽어주면서 또 웃고 둘만 웃기 아까워 여러분들도 웃어보시라고 소개해 드린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시험지를 앞에두고 고민고민하는 과정과 내린 결론을 심각하게 실천에 옮기는 모습을 상상하면 웃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열등생 시절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지금은 명문으로 유명하지만 당시만해도 명문 중학교에 떨어진 아이들이 가는 학교였다.

그러나 그 중학교도 도약의 준비를 위해 여러가지 교육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가령 성적순으로 학생을 ABCD로 나누어 A조는 수재, B조는 보통, C와 D조는 나처럼 열등생을 모아서 가르쳤다. 학생들의 경쟁심을 자극한다는 학교의 방침이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C반과 D반 사이를 들락거리는 무리 중 하나였다. 수업 중에 나는 거의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소설 따위를 탐독하며 지냈다. 그도 아니면 졸던지, 몰래 도시락을 까먹던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또 당시에 유명한 외국 배우의 브로마이드 사진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내가 제일 자신 없었던 과목은 수학이었다. 그것은 노력이 부족하다거나 태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두뇌가 선천적으로 수학적 사고가 불가능한 것 같았다. 수학 시간이 되면 영어의 알파벳도 모르는 아이가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것과 똑같은 상태에 빠졌다. 선생님의 말씀이 마치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시험 답안지가 백지였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0점’이라고 씌어진 답안지를 보고 두 살 위의 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형은 당시에 잘 나가는 명문 중학교에서 수재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정 모르겠으면, 아무 거라도 써서 내지 백지로는 내지 마!”

나는 형의 충고가 일리가 있는 것 같아 그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다음 수학 시험 때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문제지를 앞에 두고 다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모두 주관식으로 “다음을 증명하라.”였던 것이다. 과연 무슨 말을 써야 하는 걸까? 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궁여지책으로 모든 답 밑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맞다. 딱 맞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며칠 후에 채점이 끝난 후, 시험지를 돌려 받게 되었다. 나의 답안지에는 또 다시 ‘0점’이 쓰여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빵점’만 맞은 것이 아니라, 수학 선생님에게서 꿀밤세례도 선물로 받았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 따끔했던 꿀밤의 기억은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의 그 꿀밤이 아니어도 그 시절의 중학생들은 이틀이 멀다 하고 선생님이나 상급생으로부터 주먹세례를 받거나 손바닥을 한두 대씩 얻어맞는 것이 다반사였다. 따라서 내가 학교에서 얻어맞는 것은 그리 큰일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조금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그 수학 선생님이 그 말을 쓰기까지 고심한 나의 기지(機智)를 평가해 주시지 않았던 점이다. 선생님은 수학을 잘하는가 못하는가의 관점만으로 나를 채점하신 것이다.

만약 내 안에 숨겨진 그런 재치와 위트의 재능을 제대로 평가해 주셨다면, 적어도 100점 만점에 5점은 주셨어도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지금 내가 교사가 되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맞다, 딱 맞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라고 썼던 재치야말로 내가 작가가 되는데 작은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