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선물에 관한 추억

남편 교회 속식구들이 꽃다발과 화분을 선물로 주었다. 화병이 없어 유자차가 담겨있던 유리병에 꽃을 꽂고, 화분은 눈에 잘 띄는 창문 곁에 놓아두었다. 화분은 이름을 모르나 파처럼 생긴 줄기 끝에 하얀꽃이 달렸는데 향기가 그토록 좋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신다. 심성이 꽃향기 덕에 고와지는 느낌이다.

꽃다발은 줄기를 자르고 더덕더덕 붙은 초록 잎새를 골라 봉우리에 여유로움을 돋우었더니 빨강 노랑 보라 초록이 발란스 좋게 어우러져 근사한 미학이 되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과의 조우에 행복해한다. 그런데 꽃은 주로 여자들이 좋아한다. 남자들은 꽃처럼 아리따운 여자를 좋아한다. 나는 여성적인 성격이 별로 없는 편인데 꽃을 선물받을 때면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싱싱한 생화에는 한없는 부드러움과 탱탱한 강인력이 함께 들어있어서 신비롭다. 나 살아있어요,하고 소리치는 미성에 넋을 빼고 말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외적인 미는 생각보다 생명이 짧다.

활짝 피었던 꽃은 길어야 일주일정도 간다. 꽃잎의 끝부분이 바깥으로 말리고 손톱으로 짓이긴 것처럼 여기저기서 주름이 보이면 여러 송이의 줄기 끝을 한데 묶어 벽에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드라이플라워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집에 한번 들어온 꽃은 우리랑 아주 오랫동안 같이 산다. 좋아하는 것에대한 나의 의리이다. 꽃봉오리가 잘은 것은 굳이 거꾸로 세울 필요가 없지만 봉오리가 큰 것들은 거꾸로 세우지 않으면 목줄기가 휘어서 예쁜 모양이 되지 않는다. 꽃잎의 밝은 명도는 수분을 잃어가면서 칙칙해지지만 대신 운치가 생긴다. 전체적으로 볼륨이 줄어드니 인간의 세월 품은 모습을 반영하여 애잔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 드라이꽃 군단과 할 수없이 헤어져야 할 때가 있다. 이사를 가는 날이다. 이삿짐에 묻혀 바스라지기 일수이므로 그때는 할 수없이 작별을 한다.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숨어 있기에 그냥 담담히 그 날을 맞이한다. 인생을 질척거리지 않게 사는 것이 내 신조이다.

내게는 꽃에 얽힌 쑥스러운 사연이 있다. 그 추억이 떠오를 때면 겸연쩍어서 맥없이 웃게 된다.

스무살 초반에 친구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외국 유학중이었고 방학동안 한국에 들어와 좋은 여자친구와 연을 맺어서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달래보려는 절실한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사정을 잘 알지 못했던 나는 짧은 기간동안 한국에 체류하는 사람한테 굳이 야멸차게 굴 필요가 있을까, 하며 별 매력을 못느끼면서도 철없는 친절을 베푸는 계기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 남자를 위해 못할 짓을 했다. 차라리 다른 여자를 만날 기회를 주었던 편이 진정한 친절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돌아갈 무렵에는 학업에 더욱 열중하시라는 메시지로 아디오스를 전했지만 그 사람은 가끔씩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답장을 했는지 어쨌는 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 내 생일에 그로부터 투명한 아크릴 상자 안에 담긴 커다란 꽃다발을 선물받게 되었다. 그때만해도 인터넷쇼핑과 배달서비스가 생겨나기 전이라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아마도 외국에서 직접 꽃집에 국제전화를 걸어 배달시킨 것이 틀림없다. 메시지를 넣은 카드와 함께… 아무튼 그는 내 생일을 기억하고 생애 가장 커다랗고 화려한 꽃다발을 건네준 낭만적이고 심성이 고운 남자였다. 하지만 그 일로인해 나는 확실하게 내 뜻을 전해 혼자서 마음을 키워 나중에 큰 상심을 받지 않도록 진정한 친절을 베풀었다.

그무렵 공교롭게 해외에서 또 한 장의 엽서를 받았다. 오스트리아로 막 유학간 여자친구가 생일 축하한다며 보낸 메시지였다. 생일을 축하하며 정열의 장미꽃 한바구니를 보내니 자기를 생각하며 향을 음미해 달라는… 정성스럽고 판타지한 생일카드였다. 이후로 나는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올 그 장미를 기다렸다. 비행기를 타고오는 동안 시들지 않을까? 공부하기도 바쁠 터인데 이런 신경까지 써주다니… 이런저런 생각으로 내 마음은 정열의 장미보다 더 붉게 온기를 느꼈다. 그런데 일주일, 열흘이 지나도 꽃은 배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에게 답장을 썼다. 아무래도 네가 보내준 장미가 도중에서 분실된 것 같다… 하지만 그 정성만큼은 끔찍스레 접수되었다. 사랑한다 친구야…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편지를 보내자마자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친구의 엽서를 뒤집어 보니 아뿔사 장미꽃은 그 그림 속에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무슨 망상의 착각으로 꽃바구니가 따로 배달될 거라고 철썩같이 믿었을까? 그 우문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표현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그 남자가 보내준 화관때문에 친구의 문구를 마음대로 해석했던 모양이다.

두 관련없는 지인들의 연관없는 행위를 혼자 뒤죽박죽 섞어서 희안한 에피소드로 탄생시킨 추억…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겸연쩍어서 허무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