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카락을 지켜내신 할머니

샤워를 마친 아린이의 머리카락을 헤어드라이어로 말려주려는데 전에 없이 자꾸 머리를 긁적인다. 잘 헹군거야? 네엥. 그런데 왜 자꾸 머리를 긁어? 별 뜻 없이 대화를 나누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머리 안을 세세히 들추어 본다. 까만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하얀 비듬덩이같은 것들이 보인다. 손끝으로 슬쩍 털어내 보지만 단단하게 엉겨있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이거 혹시…

꺄악~!

한번 콩닥대기 시작한 심장이 탄력 붙은 방아질처럼 늦춰지질 않는다. 이를 어째… 내 더듬이는 이미 베개 위, 침대 시트, 옷장과 방바닥까지 안테나를 뻗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라니 이라니… 21세기에,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잘 산다는 미국에서 게다가 꼴난 아파트 렌트비가 웬만한 동네 하우스 모기지 만큼 비싼 이 동네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성능 떨어진 뇌 속으로 한꺼번에 들이닥친 생각들 때문에 초토화 패닉 상태가 되었다. 이런 일은 드물었다. 철나고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 어찌해야 좋을 지 몰라 눈 앞이 캄캄해 지는 일, 미리 앞서 걱정이 태산처럼 부푸는 일, 생각만해도 소름끼치는 일… 그러고보니 가끔 이 학교에서 이가 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는 것 같다. 설마했다. 이것이 현실이 될 줄이야…

내 몸에서 가장 차가운 영역을 차지한 이성이 보다 못해 일어섰다. 갈지자로 비틀대는 정신이란 놈의 엉덩이를 그야말로 정신나게 걷어차고 명령한다. ‘너는 엄마다. 엄마는 강하다. 너는 이 난관을 헤치고 곤경에 빠진 네 딸을 구하라. 그렇게 버둥대지만 말고…’

나는 심호흡을 하고 이성의 말을 되새긴다. 백번 옳다. 이 엄마가 아니면 누가 어린 내 딸을 이로부터 지켜낼 것인가? 일단 컴 앞에 앉아있는 남편한테 웹사이트를 뒤져서 이 박멸책을 알아보시라고 명령한다. 남편이 외친다. 이 전용 샴푸로 감기고 참빗 같은 걸로 빗겨서 egg를 떼내고 침구는 매일 뜨거운 물로 빨고 수건도… 빗은 따로 쓰고… 때는 9시를 육박하려는 찰라, 지갑을 들고 총알처럼 튀어 나간다. CVS를 향해 열나게 달린다(물론 자동차로). 나는 야맹증이 있으므로 평상시 같으면 남편이 해 줄 일이었지만 일초가 급했다. 예상대로 막 문 닫을 준비를 하는 점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효능 좋은 샴푸를 권해달라고 부탁했다. 돈을 지불하고 나가려니 출입문을 잠궈놓고 다른 점원이 내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이었다.

한 단계 임무를 완성한 탓인지 근육들이 스륵스륵 풀어졌다. 그때서야 다운 타운의 한산한 도로와 문닫힌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다. 라디오 음악소리도 들렸다. 차창 밖엔 달도 떠있었다. 달빛과 라디오라는 조합때문인지 문득 먼 기억의 시간들이 아스라히 떠오른다. 그 시간의 타래에서 이와 서캐가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장지문 안으로 어스름한 달빛이 들어오고 15촉짜리나 되었을까, 겨우 어둠이나 벗겨 놓은 알전구 빛은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와 함께 황토방을 짙은 주홍으로 메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돋보기를 쓰시고 내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넘기신다. 다섯 살? 혹은 여섯 살 쯤 된 나는 코를 움켜쥐고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 암모니아수란 기억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아무튼 내 머리에서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등을 덮을 만큼 긴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넘기다가 놈들을 발견하면 엄지와 검지 손톱으로 주욱 훑어 내려 잡힌 놈들을 꾹 눌러 죽였다. 어디 봐, 어디… 나는 어떤 놈들이 내 머리에서 피를 빨아먹고 있는 지 궁금했다. 놈들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할머니 무릎에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거지며 한 놈 한 놈이 살상될 때마다 신나하던 나와 “움메, 여그 또 있네, 아나, 어디 죽어봐라” 하며 용감하게 나를 위해 놈들과 싸워주시던 할머니 생각은 아주 또렷이 난다. 그때 할머니가 나를 위해 열심히 싸워주시지 않았다면 내 긴 머리카락들은 잘려나가 민둥산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눈도 침침하시고 등도 아프셨을 텐데 손녀딸 위해 병정놀이까지 하신 울 할머니… 오늘 따라 사무치게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