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아

남편이 한국으로 출장을 갔다. 화창한 4월의 어느 날이다.

그 파릇한 봄하늘에 사루비아꽃같은 구름이 피어났다. 몽글몽글 예쁘게 피어났다. 구름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자벌레처럼 기어갔다. 빠르지만 느리게 기어갔다. 그 구름을 이끌고 한 마리 새처럼 비행기가 날아갔다. 보스톤에서 남편을 태우고 동방 예의지국, 한국으로 날아갔다.

남편이 떠난 집은 많이 허전했다. 공항에서 돌아와 집 문을 열었을 땐 벌써부터 남편 자리에 그리움이 엉겨붙어 있었다. 남편이 출장을 가면 나는 첫 날 가장 그리움을 느낀다. 아직 체취가 진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난자리가 커보이는 것은 상대에대한 애정 척도란 생각을 했다. 난자리가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사람이 떠나서 반갑다는 소리이며 난자리가 통쾌한 것은 떠난 자와 갈등이 심했다는 소리일 것이다. 난자리를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 떠난 사람과의 관계가 정립된다. 난자리에 그리움이 가득하니 나는 남편을 아직도 많이 사랑하는가 보다.

남편을 오전에 떠나 보내고 저녁에 한인교회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갔다. 남편없이 온 연유를 아신 어르신께서 자유네?란 정겨운 농담을 하셨는데 선명한 성격인 나는 본때없이 남편에대한 그리움을 고백하는 실례를 범하고 말았다. 그 어른의 생경스런 표정을 일견하며 미국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는 회의가 밀려왔다. 어른 앞에서는 그립더라도 그립지 않은 척을 하는 것이 동방예의지국 법이었던가??… 가끔 미국법과 한국법이 틀려서 국제 미아가 된 어지러움을 느낀다. 게다가 아니면서 그런 척할 수 없는 성정이라 실례라도 어쩔 수 없었다.

부부는 두 몸으로 만나 한 몸으로 완성되는 관계여야 하지만 사실 그 일이 그리 쉬운 떡 먹기는 아니다. 그러려면 살 부비며 사는 오랜 세월도 필요하고, 같이 웃고 울고 노하고 즐거웠던 추억도 필요하고, 엉켰다 풀리는 수많은 매듭 놀이도 필요하다. 15년 넘게 줄창 그런 것들을 함께 쌓아온 덕인지 우리 부부는 서로 흉보던 것도 닮고 밉상이라며 눈살 찌뿌리던 것도 닮아가서 내가 남편같고 남편이 나 같다. 이런 것이 한 몸일 것이다…… .

사실 남편은 행운아다. 오매불망 그립게 짝사랑하던 여자와 백년가약을 맺었으니 행운아다. 결혼을 하자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품에 안은 기쁨으로 한껏 피어났다. 생애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고 고백하며 늠름해졌다. 아내의 눈에 남편이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연애했을 땐 끼더라도 결혼하면서 벗겨지는 것이 상식적인 콩꺼풀 놀이이다. 그 상식선에서 벗어난 희귀한 아내를 두었으니 그의 행운은 도를 넘는다.

처자식을 두고도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꽃청춘을 바쳐 희생한 아내와 그 덕에 잘 크고 있는 두 딸을 두었으니 행운아다. 외적인 것보다 내 적인 것을 추구하고 그렇게 자식을 가르치는 아내를 두었으니 행운아다. 채찍과 위안을 동시에 줄 줄 아는 아내를 두어 행운아다. 시간에 깍쟁이고 체력은 조금 찌질하지만 지혜를 갈구하는 아내를 두어서 행운아다… 그는 그런 아내가 한없이 사랑스러운 행운아다.

그 행운아가 한국 가기 전에 사랑하는 막내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린아, 밤에 엄마랑 같이 자. 엄마 추워하니까 춥지 않게 꼭 껴안고 같이 자…”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내의 가슴이 참 따뜻해졌다. 그래서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아내는 깨달았다.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을 곁에둔 행운보다 더나은 행운이 또 있을까... 행운아는 남편이 아니라 바로 아내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