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앞두고...

여행중에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전에 없이 히마리 없고 내면의 울림이 진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마음이 눈치를 챘다. 아니나다를까 남편의 일관계로 메사추세츠를 떠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지난 몇 년동안 친구 남편은 직장 상사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힘들어 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좋은 곳에서 오퍼를 받게 되었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둘지도 모르게 되었는데 문득 내 목소리가 듣고 싶어져서 전화를 하는 거라고 했다. 우리 가족이 막 한식 부페집에 가서 고픈 배를 마음껏 채우려는 순간이었다. 급작스럽게 식욕이 없어졌다. 상사가 의도적으로 고가점수를 낮게 줘서 매 해 치르는 승진시험에서 실패를 하며 겪었던 마음 고생, 그들의 문화로는,친구네는 일본 주재원이다, 아직까지도 평생직장이라는 관념이 강해서 중간에 직장을 옮긴다는 사실이 꽤 대단한 결심이 아니고서는 힘들다는 사실 등이 떠올랐다. 친구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초조가 전화를 끊은 후에도 내 가슴 속에서 뭉글뭉글 돌아 다녔고, 그 식당의 음식은 참 맛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종교도 그렇고 문화적으로 미신을 많이 믿는 편이다. 남자 나이 40이 되면 3년간 풍파를 겪는다는 말이 있다는데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우연찮게 친구 남편이 딱 그 나이에 미국에 왔고 그야말로 몇 년동안 이러저러한 풍파를 많이 겪어 마치 피해갈 수 없는 굴레인 듯 현실이 되버리고 말았다. 사람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라 우리 가족도 별반 다르진 않았지만 친구도 나도 주어진 것에서 감사함을 찾으려 노력하는 타입이라 서로 위로와 자극을 주며 열심히 사는 중이었다.

어떤 만남에 이별이 없을까만은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헤어지는 건 진심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내가 친구네 가족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아이들 학교 오픈하우스에서였다. 옆자리에 앉은 한 남자가 정말 이런 경험 처음이예요, 무얼 어찌 해야 하나요?,라는 의미를 두 눈에 담뿍 담고서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 눈빛을 헤아린 내가 말을 걸었는데 역시 일본에서 이사온 지 채 며칠이 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여러 면에서 도움이 필요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연락처를 교환했고 하루이틀 지나 내가 그 댁에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해서 친구와 나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외국 경험이 많은 친구는 일본인의 특성과 서구인의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다이나믹 하면서 꽤 다각적인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이해심 많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그녀에대한 첫 인상이었다. 몇 번의 만남을 가지면서 우리는 내면의 유사점을 보석 캐듯 서로 내보이며 발견했고 그래서 동류의식을 느꼈다. 우리 둘다 무지 솔직한 편이고 그 점이 자석과 철핀처럼 서로를 끌어당겼으리라.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말을 하면 저도 모르게 나오는 서로의 맞장구였을 것이다. 그 친구는 체기가 내려가는 것처럼 시원해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마음껏 풀어헤쳐 보였다.

무슨 말을 했을 때 빈 산의 메아리처럼 한 말이 그냥 되돌아오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 큰 산에 혼자 있다는 실감이 그때만큼 절절하게 다가올 때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는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낸 후엔 대부분 그 상대와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쉽게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점이 같을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는 서로 잘 맞는 요소가 있고 그 점에 교집합을 만들어 한 무리 안에 들어가길 원하는 마음이 컸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대화를 나눈 후 오히려 상대와 더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귀한 시간을 내어 그 사람과 인생의 한 순간을 같이 하는데 돌아오는 것은 벽에 부딛혀 들리는 내 말소리 뿐이라면 그 사람과 또 만나고 싶을까. 어쩌다 그런 사람을 만난 후는 마음이 공허해져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천천히 숨을 들이키게 된다. 세월따라 자신만의 강한 세계가 구축되어 그 안에서 굳어지고 닫혀지는 벽... 그것이 나이의 벽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벽을 깨야 젊게 살 수 있을텐데…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젊게 살려고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고 틀린 말이 아니라면 맞장구부터 쳐주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노력에는 희생과 봉사가 따르니 노력하지 않고도 죽이 잘 맞는 사람이 더 좋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말이 빈 산의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친구. 그 친구가 조금 있으면 멀리 떠난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그녀는 언제나 내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