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끈했던 여름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밤이면 밤마다 이렇게, 밝혀놓으셨나요~’ ‘나는 가수다’라는 한국 TV프로에서 이소라가 불러 가슴에 진한 여운을 남긴 그 곡을, 누군가는 님을 향한 연정을 품고 노래할 적에 나는 자꾸 멀어지는 여름을 향한 그리움때문에 처량맞게도 흥얼댄다. 메사추세츠로 이사온 이후, 여름의 광팬이 되버렸다. 하지만 간다는데 어쩌겠나, 쿨하게 보내야 할테지. 단 이별을 고할 때는 이 한마디를 덧붙여야 겠다. 이번 여름, 너 참 화끈했다!

늦은 봄 이사할 적에, 비좁은 우리집에 널따란 다락이 있는걸 발견하고 옳다구나,하면서 어디에도 부려놓지 못하던 짐들을 마구 쑤셔넣을 때는 좋았다. 그런데 한달 반만에 역시 ‘인생지사 세옹지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더라. 더 괜찮은 집이라면 그 곳은 단열재로 빼곡히 덮혀 있을 터였다. 날씨는 또 이리 더울줄 누가 알았나. 화끈한 폭염이 이어지는 나날동안 우리 부부는 한 낮의 태양볕을 그대로 감싸안은 2층방에서 밤새 뒤척이다 아침이면 뿌얘진 눈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러 잠을 깨곤 했다.

달랑 한 대 있는 에어컨이 그나마 공기 선선한 1층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몹쓸 모순처럼 여겨지던 이 여름, 그 뜨겁게 달아오른 우리집에 손님들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많이 다녀가신 것도 화끈했다. 묘하게 겹치지도 않고 차례차례… 손님들이 언제든 들러 차 한잔이라도 편히 마실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인지 5년이나 살았어도 영 남의 땅같았던 메사추세츠가 느닷없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한 친구가 Boston Red Sox 모자를 쓴 후부터 자신은 보스톤 사람이 된 듯 느껴졌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말의 진실성을 온 몸으로 감지했다. 사람에게는 계기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사방이 낯선 곳에 갔을 때 문득 한 사람의 친절을 계기로 그 곳에 정을 붙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나는 이웃과의 분란이 없어 평화가 도래한 이 집을, 그 친구는 ‘B’자가 새겨진 모자를 MA에 정붙이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이 땅이 좋아졌다는 말은 여기서 사는데 특별한 갈등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란 지금 우리 가족이 사는 이 터를 의미한다. 너무 평온해서 코에서 밍밍한 냄새가 날 정도다. 하지만 안팎으로 초 다사다난해서 삼재가 끼었다 할만큼 정신 없었던 올 상반기의 막바지는 때마침 화씨 90도를 웃도는 열기때문에 자신이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같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여러모로 지쳐있는데 일마다 족족 꼬이는 그런 시기였다. 그럴 때는 다툼이 잦아 부부사이도 멀어지기 마련이다. 서로 애틋한 감정을 느끼기에는 삶이 너무 볶아대던 어느날…

나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한테인지 혹은 남편한테인지, 여하간 쇼크를 받았다. 약간의 말다툼이 있던 끝에 남편으로부터 ‘너’란 소리를 듣게 되었던 순간이다. 나는 남편에게 영원한 여왕인줄 알았다. 그런데 여왕님께 너라니… 머리속이 엉망으로 엉켜들었다. 솔직히 너란 칭호,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우리는 대학 때 친구였고 나는 학생 때부터 남편을 그렇게 불러왔고 그래서 화가 나거나 장난을 칠 때면 서슴없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던 단어였으니까.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내가 띠 다른 연상이라서인지 언제나 이름을 부르거나 당신이란 호칭을 사용했었다. 그의 입에서 게다가 말다툼 끝에 흘러나온 그 단어는 마치 내게 육두문자처럼 들렸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단 듣고보니 부부사이에 ‘너’라는 단어에는 존중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이 달려들었다. 그런데 나는 남편을 잘도 그렇게 불러댔다.

결국 제 발등을 찍었던 것이다. 어떤 아이가 울면서 엄마한테 말했단다. “산이 자꾸 나보고 바보라고 해요” 그러자 엄마는 “다음엔 이 천재야, 하고 불러보렴”이라며 빙그레 웃었다지… 바로 그짝이다. 결국 남편은 산울림의 법칙,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었을 뿐, 궁극적인 잘못은 내게 있었다. 날도 더운데 지지부진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부터 고칠 것을 결심하고, 당신은 무조건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는 경고를 날렸다.

그 일을 계기로 찬찬히 살펴보니 문제는 단지 호칭뿐이 아니었다. 평상시 내가 하던 버릇이 남편한테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유치하면 대꾸도 안 하고, 조금 허황하면 남편 말을 무시하고 내 페이스로 나가곤 했던… 하지만 나름 정당성 있을 때만 시행하던 나의 행태들을 남편은 아무때나 거울처럼 반사하고 있었다. 이건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었다. 그런 대접이 말이 안 되서 조목조목 따지며 수차례 태클을 걸었지만 다툼만 이어졌다.

태양볕이 이마를 태우려고 달려들던 어느 날, 도저히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편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물론 직장생활로인한 스트레스의 영향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버려놨으니 내가 고칠밖에란 생각을 했다. 얼마나 각오가 대단했는지 예전의 남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한국으로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부부회담을 요청했다.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했다. 큰 소리도 터지고 반박도 나왔다. 그렇게 화끈하게 달아오른 날에 화끈하게 싸움을 했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고 회담은 win-win의 성공을 거두었다. 유치하던 허황되던 나는 무조건 남편말을 존중하기로 하고 남편도 그에대한 산울림 법칙을 따르는… 내가 여왕대접을 받고 싶으니 어쩌겠는가 남편을 왕대접 해줄밖에… 생각해보니 의도적이었던 아니었던 남편은 고단수였다.이런 뜨거운 맛을 보다니… 이번 여름은 정말 화끈했다!

p.s.  혹, 지금 배우자와의 관계때문에 고민하시는 당신이 계시다면 이 글이 미미하게나마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절대 이성을 잃지 마셔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