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Yoojin Kim

낡은 이불같이 허줄한 마누라의 결심

베갯잇들을 세탁기에 담궈놓고 빨지 못했다. 잠시만 때를 불렸다가 세탁한다는 게 이래저래 바빠서 한 밤중이 되도록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내일 빨지 뭐… 10시가 넘었으니 아파트에서 소음은 자제해야한다. 린넨 벽장을 열고 여벌의 베갯잇을 찾는다. 어라? 이게 왠 거지? 눈에 익지 않은 홑이불이 보인다. 한참을 더듬다가 몇달 전에 아울렛몰에서 샀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떠올린다. 이런, 기억력하고는…

낯선 꽃무늬이불은 갓 시집온 새색시의 혼수품처럼 산뜻하고 짱짱해서 14년차 구색시의 다른 이불들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시집 올 때 해 온 누비 이불과 침대커버는 하나같이 실밥이 터져 허연 솜이 드러나 있고 나머지 것들도 색이 바랬거나 허줄허줄 낡아 있다. 너희들도 나처럼 중년이 되었구나! 막 시집왔을 땐 그리도 파릇파릇하더니만… 감히 갖다 버리고 새 걸로 바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이유를 이제사 깨닫는다. 낡은 이불에서 나를 느끼는 모양이다. 여름에 그 중 하나를 가져다가 모래 위에도 깔고 풀밭에도 까는 돗자리용으로 사용한 것이 생각났다. 그렇게 갈 때까지 가보자! 연민인지 알뜰함인지 살뜰함인지 모를 감정으로 마치 이불들에게 용기를 주 듯 중얼거린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베갯잇이 보이지 않는다. 원체 눈 앞에 물건을 놓고도 찾지 못하는 나의 특질상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다. 그런데 남편도 찾지 못한다. 어찌된 일일까, 또 곰곰히 기억을 더듬는다. 확신은 없지만 아마도 큰 맘 먹고 내다 버린 것 같다. 낡을 대로 낡아서 날실과 씨실 사이로 구멍이 드러나던 베갯잇들. 빨았다는 이유로 한번 더 쓰고 또 쓰다가 이래서야 속베개만 베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래서 어느날 쓰레기통에 과감히 쳐박아버렸을 거라는 추측…

그렇지 않아도 누더기같은 이불들이 내 모습을 투영하는 듯해 기분이 언짢았는데 또 한가지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건망증! 아이 두녀석과 엎치락뒤치락 살아가는 동안 순간망각증세가 가끔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토록 까맣게 생각을 못 해내는 일은 없었건만... 무언가 잊은 듯해 집에 다시 들어갔다가 해 쨍쨍한 날에 애꿎은 우산만 챙겨나왔다던지, 계단에 서서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다가 올라가는 참인지 내려가는 참인지 엇갈려 했다던지, 집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았다던지… 하는 남들의 일화는 귀엽게만 들렸는데… 막상 내게 닥치니 뇌마저 늙는 것이 보여 씁쓸하다.

하필이면 좀 전에, 남편이 10년 전 내 사진 한 장을 발견해 들여다보면서, 와, 젊다!! 딴 사람 같다! 를 외쳤더랬는데… 눈꼬리가 튿어지도록 째려보는 내게 허둥거리면서 ‘연예인같아서…’ 라고 생뚱 마무리하던 남편의 익살이 서글펐는데… 오늘 밤, 얼굴 뿌연 사진만을 블로그에 올리거나 내게 보내주는 친구의 심보를 알 것도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늙고 있는 것이다. 늙음에 아직은 반기를 들고싶지만 증거들이 속출하니 발뺌도 못하겠다.

하지만 정신이 초롱초롱하지 않아 신나는 일도 있다.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던 서운한 말이 희미한 기억과 함께 퇴색하는 게 보인다. 그때 무슨 말에 상처를 입었었지? 일부러 꾸역꾸역 생각해 보지만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기억나 거듭거듭 가슴을 찌르던 비수가 무뎌져서 이젠 흔적만 남아있다. 뇌의 퇴화가 나쁜일만 저지르지는 않는군요^*^

나이들면서 나이들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마음을 수양하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거울 속 눈가에 굴곡 큰 주름을 발견했을 때, 푸른기가 돌던 흰자가 더이상 청결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때, 생전 처음 병자가 되어 앓다가 수술하고 그후 3년쯤 늙어 보였을 때, 암산은 어눌해지고, 건망증이 팽대하고, 3층 계단을 오른 후 다리가 아파 쉬었다 가야 할 때 덮쳐오던 가슴앓이, 가슴앓이… 마치 젊음과 여자가 한통속이 되어 젊음이 가면 더이상 여자는 없고 아줌마만 남기라도 하는 듯 위기의식이 느껴지곤 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잖아, 그래야 죽을 때 안 억울하겠지, 젊음을 잃는 대신 지혜와 혜안을 구하게 되지 않어, 라면서 애써 마음 달래는 법을 터득했다. 도닦는 일이 별걸라. 마음을 달래는 일이겠지. 늙지 않으려고 발악만 하다가는 성형외과와 정신과 문턱만 낮아지지 싶다.

누구라서 세월과 맞설 수 있을까? 차라리 받아들일 걸 잘 받아들이고 넉넉하고 볼품있게 늙는 모습을 간직하자. 아직 젊다고 빠득빠득 우기는 대신 주름선 하나라도 고운 형태를 이루도록 마음심보를 다듬자. 남편이 10년 전 사진을 보고 감탄을 하면 그 땐 젊어서 예뻤지? 지금은 속이 더 예뻐졌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진짜루 멋지게... 낡은 이불처럼 허줄한 마누라가 오늘 밤, 이른감은 있지만 그런 결심을 해본다.

마음을 달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