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락바락 집없이 살아야 하는 이유

생일파티가 있어 아이를 친구집에 데려다 주고 온 남편이 “R네 집도 참 좋대!” 라고 말한다. R네 집 뿐이 아니라 C네 집도 S네 집도 다 좋아서 가끔 아이는 말한다. “우리도 그런 집에서 살면 좋겠당.”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즈음은 ‘나도 나가서 일해야 할까?’ 란 생각까지 연결이 될 때가 있다. 그 애들 엄마들은 모두 일을 하니까. 그러다가 곧 아니야, 아니야,라고 고개를 젖는다. 그리고 딸들에게 묻는다. “너희들 학교 갔다왔을 때 엄마가 있는게 좋아? 아니면 내니(nanny)가 있는 게 좋아?” 그러면 정답이 나오는 것이다.

남편이 공부하는 동안 있는 돈 술술 까먹으면서 털털이가 되어갈 무렵 무섭게 달려드는 위기의식을, 졸업하면 다 보상이 될거야,란 터무니없는 희망으로 물리치며 근근히 버텨냈건만… 막상 직장생활이 시작되었어도 별다를 것이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는 ‘인생 슬럼프’란 고충을 떨쳐내느라 용을 써야 했다.  내가 착각 속에 살았구나,란 자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흔히 말하는, 손에 물 안 묻히고 사는 삶을 영위할 줄 알았던 그 착각. 현실과는 동떨어져도 한참 동떨어진 허망한 착각.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지만 그런 생활이 영위되지 않는 것을 보면 쓸데없는 망상인 것이 틀림없다. 손에 물 안 묻히기는 커녕, 더러운 걸 보면 맨손으로 벅벅 문질러 닦고 오물도 덥석덥석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김치깍두기 담그면서 고추가루 범벅되고… 그러느라 광고를 찍었던 섬섬옥수가 울퉁불퉁 험하게 변해간다.

남편은 어렵사리 구한 직장인만큼 마음껏 축하를 받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속과 겉을 따로 관리하지 못하는 나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문에 남편은 한동안 삐쳤는데 나는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 더 화가 났었다. 정작 삐쳐야 할 사람은 누군데…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유학생 와이프처럼 힘든 역할도 드물다. 그러느니 차라리 같이 공부를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나도 엄마 아버지 보살핌만 받고 살아왔더랬는데, 결혼해서 남편 밥해주고 도시락 싸주고 빨래해주랴, 힘들어 하면 기운 북돋워 주랴, 홀어미처럼 자식 키우랴, 둘째 만삭해 가지고 코스코에 혼자 다니니 직원들이 솔선해서 짐을 옮겨주고… 남편은 사라지고 뒷바라지할 큰 아들만 있는 격이었다. 얻은 가구들에 천커버 만들어 씌워쓰고, 제대로 된 옷 한벌 산 적 없고, 마음에 쏙 드는 예쁜 그릇을 보면서 나중에 만나자, 애틋하게 기약하고… 오죽하면 외국에서 제일 널널하게 사는 사람은 주재원 부인이요 가장 비참하게 사는 사람은 유학생 와이프란 소리가 떠돌겠는가. 우리는 집을 사서 살았지만 조지아는 집값이 정말 싸서 아파트 렌트비를 내느니 모게지를 내는 편이 집값 상승을 생각해보면 이득이란 계산 때문이었다. 깨끗하고 너른 집에서 살 수 있어서 감사했지만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는 호사는 주재원 부인의 몫으로 넘겨야 했다.

보다 나은 삶이란 무엇일까? 그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는 생활을 의미하는데… 정신적으로 구속받는 것은 없었으니 경제사정이 나아지는 일만 남았건만 차라리 한국 살 때의 형편이 나으니 왜 미국 유학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첫 술에 배부르기를 바라는 건 과욕이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일은 또다른 실망을 부르지 않기위해 필요한 세계이다.

아무튼 살면서 퇴보한 건 경제사정만으로 충분했다. 정신마저 퇴보하는 일은 삶의 의의를 상실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버리게 된 것이 물욕(物慾)이다. 우선 집 값이 엄청 비싼 MA에서 집 욕심부터 버렸다. 편평한 뒷마당에 놓인 트램폴린 위에서 방방 뛰는 아이들을 부엌창을 통해 바라보는 일, 집 안 적재적소에 필요한 가구를 배치하고 어디서든 안락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배려하는 마음, 멋진 커텐을 달고, 아이들 방을 꾸미고… 그런 꿈을 꾸어본 것만으로 황홀했다고 자위했다. 그러면서 마인드컨트롤의 명수라고 혼자 낄낄거렸다.

그런데 인생에 꼭 한가지 정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막상 살다보니 MA는 겨울에 매섭게 추워서 난방이 커다란 문제이며, 여름엔 잔디 깍고 가을엔 낙엽 치우고 겨울엔 눈 치울 일이 과제로 주어진다. 정원 돌보는 취미가 없고 추위를 유난히 많이 타는 나는 어느새 주택에 사는 일이 커다란 도전처럼 여겨졌다. 겨울이면 어쩌다 초대되어 가는 주택에서 외투를 벗을 수도 없으니... 그럴 때면 조그맣고 따스한 우리 아파트로 돌아와 모순된 행복감에 젖는다. 오랫동안 바락바락 집없이 살아야 할 이유인 것이다. 추운 겨울동안 맘껏 따스하게 지내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살갑게 맞아주고 맛있는 간식도 챙겨주는 대가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