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겨울이야기

1)       며칠 전 아침엔

세상이 하얗게 사라졌다. 밤부터 신들린듯 눈이 쏟아진 탓이다. 풀밭에도 지붕에도 나무에도 강 위에도… 마시멜로 거품같은 눈, 컵케익 후로스팅같은 눈, 감자 전분같은 눈… MA의 맛을 품고 소복소복 내린다. 먹어본다면 쿨하고 달콤하고 질리지 않는 맛이 날 것 같다. MA의 첫눈은 끝눈에 섞여 봄이 올때야 녹아내리는 기이한 풍경을 간직한다. 3한(三寒)동안 눈이 왔다가도 4온(四溫)이 되면 녹아서 흔적 없어지는 한국과는 다른 모습이라 당황스러웠다. 이곳 겨울은 눈을 실컷 볼 수 있어서 좋지만 눈때문에 곤란한 일도 많다. 주차장과 도로는 점점 좁아지고 곳곳에 눈으로 된 둔산이 쌓여 시야를 막기도 하고 조금 녹는다 싶은 날엔 홍수난 세상처럼 질퍽해져서 바지 밑부리가 젖는다.

조지아에서 5년, 캘리포니아에서 2년 살다 온 우리 가족이 MA에서 맞은 첫겨울은 황당했다. 아파트 끝집에 살아서인지 사방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집에서조차 오금을 못 펴게하고 발코니에 위치한 가스탱크의 불꽃이 자꾸 꺼져서 샤워하다가 찬물을 뒤집어쓰는 일이 잦았다. 결국엔 자동점화되는 탱크로 갈아준다고 선심쓰면서 집을 비우라고 한 날이 하필이면 내 생일날이었고 자동차 범퍼를 막 갈았는데 며칠새 누군가 깨뜨려놓고 메모 한장 남기지 않은 일도 있었다. 민감한 내 얼굴피부는 히팅바람을 맘껏 쐬서 가슬가슬해지고 따뜻한 외투를 한국에 두고 온 탓에 겨우내 단벌신사노릇을 했다. 좌충우돌, 험난한 겨울나기였다. 이제나 저제나 봄을 기다리는데 4월달에 꽃소식 대신 눈사태를 맞게되자 머리가 빙빙 돌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막 터지려고까지 했다. 결국 그 눈을 마지막으로 봄이 도래했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해부터는 한겨울을 꼭 두토막으로 나누려고 애쓴다. 12월부터 3월사이에 남쪽으로 피설(避雪)을 떠나는 것이다. 아리조나도 좋고 워싱턴DC만해도 괜찮았다. 뉴욕이나 뉴저지정도는 서울날씨와 비슷해서 견딜만하다고 느낀다. 올해엔 플로리다로 긴긴 자동차여행을 떠나자고 한다. 조지아 살 때 원없이 가봤던 플로리다건만 남편과 아이들이 한통속이 되어 타령을 해대니 그러기로 한다. 오며가며 나흘을 달려야 할 일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심난하다. 이제는 꼭 나이값을 하고 말기 때문이다(무리하면 꼭 몸살나니까^^).

어떤 이의 어린시절이 생각난다. 중학생때 슬립오버 생일파티를 했는데 밤새 내린 눈으로 다음날 발이묶여 일주일동안 꼼짝 못하게 되었단다. 오도가도 못하는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기위해 끊임없이 엔터테인먼트를 대느라 진이 빠질대로 빠졌었다고… 다음해부터 그런 파티는 꿈도 꾸지 않았다고… 스노우스톰때문에 전선이 종종 단절되고, 난방비로 수백불을 지불하기도 하는 MA의 겨울. 눈으로인해 학교마저 취소되는 일이 잦고, 집에 갖혀지내는 일이 많은 뉴잉글랜드 지역사람들에게 생긴 특성이 있는데 ‘yankee mentality’가 그것이다. 갖혀 지내다보니 자신들의 세계를 지나치게 귀히 여기는 습성이 붙고 그러다보니 자신들의 성벽이 높게 쌓여 계몽되지 않은 다른 사람을 얕보게 되었다는 사고방식(고학력자들이 많은 탓인듯…). 뉴잉글랜드지역인들의 높은 콧대를 형성시킨 여러 이유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 눈이라니 이상한 인연도 다 있다. 언뜻 대하기에 차갑게 느껴지는 이 지역 사람들이 한번 우정을 다지는 사이가되면 깊고 오래가는 이유도 많은 사람과 접하지 못하는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일이라니 그래서 지역특색이란게 생겨나는가 보다.

2)       오늘은

그간에 비랑 섞여 녹았던 눈이 꽁꽁꽁 얼어붙었다. 사람들이 새파래진 얼굴로 추워,추워, 한다. 작고 정겨운 선물을 주고받고 부지런한 분의 크리스마스 카드도 날아든다. 어느새 일년을 뒤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올 한해 쿨하고 달콤하고 질리지 않는 맛의 시간을 보내셨다면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내년에 좀 더 분발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는 반드시 소원을 꼭 이루시고 복 풍성히 받으시라고 기원한다. 모자란 글을 기꺼이 읽어주시고 따스하고 친근하게 용기주셨던 분들께 고개숙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전하고 싶다.

Merry X-mas &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