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기회를 잃고...

나는 소위 말하는 8학군(교육의 과열지역)과는 전혀 상관없는 동네에서 자라났다. 미아리, 망우리, 구로동...... 미아리하면 떠오르는 것이 미아리고개의 점집이요, 망우리는 공동묘지요, 구로동은 공단이니 알만한 분들은 이 지역들이 낙후된 동네임을 아실 것이다. 미아리는 어린시절 깨복쟁이 동무들과 섬머슴처럼 뛰어놀던 곳이라 내게 고향이란 이미지가 강하지만 교육의 요충지는 결코 아니었다. 그래도 행복한 추억이 그득한 곳이다. 그곳에서 망우리로 이사간 연유는 조금 묘연했다. 아버지 친구분이 지은 빌라가 미분양이 되어 그분을 도와줄 양으로 집을 옮겼다는 정도로만 기억한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첫사랑인 남학생을 떠나야 하는 안타까움때문에 말도 못하고 괴로워 했다. 방학이면 옛 친구집에 놀러가 슬그머니 그 아이 소식을 전해듣곤 했는데 훗날 날날이로 변한 모습에 실망하여 첫사랑의 애틋함이 사그라져 버렸다.

어쨌거나 그 빌라 주변엔 야산과 배밭과 채마밭과 벽돌공장이 있었고 오직 네 채의 빌라건물만 덩그라니 그럴싸하게 놓여 있었으며 지금 나는 그곳에서 다녔던 고등학교시절 이야기를 하려한다.

변두리 S사립여고의 교장선생님은 성씨가 ‘ㅇ’가 셨다. 많은 이들이 그분을 왕(king)이라 부르며 비아냥 댔다. 교문 앞 굴다리는 왕궁의 입구이고 학교는 그의 궁전이었다. 자세한 바는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를 기업식으로 운영한 방침때문인 것 같다. 교육의 질에 힘쓰기보다는 방만한 경영에 주의를 기울인 증거로 주변에 자매 학교가 두어개 생기는데 여학교 바로 옆에 남학교와 전수학교가 들어섰다. 뒷쪽으론 숲이 우거지고 앞에는 인가나 상점 하나 없이 개울(?)을 반쯤 막아 만든 복개다리가 있었다. 그 안쪽에 세 개의 남,녀,전수,야간 학교가 오롯이 들어 있는 것이다.

입학과 동시에 독어, 스페인어, 일어 중 하나를 택해야 했기에 나는 일본어를 선택했다. 그런데 한번의 예외도 없이 반 성적이 독어, 스페인어, 일어반 순이 되었다. 알고보니 그건 우리 학교에서 전통처럼 유래되는 양상이었다. 이유를 따져보니, 각 외국어별로 선생님들이 다르게 배치되었고 그 선생님들에의해 학습 분위기와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결과였다. 나만해도 어떤 과목은 덮어놓고 잠을 잤다. 나는 꼴찌반을 구성한 일원으로서 실로 많은 불이익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우리 영어선생님, 반은 놀고 반은 수업하면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예쁜 애들을 찾곤 하셨는데 얄궂게도 곤란한 지경을 당하셨다. 불만이 많았던 아이들이 그 선생님의 교과서에 적힌 빽빽한 메모를 지웠던 모양이다. 아무것도 모른체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은 극도로 당황하시고 문장조차 제대로 해석을 못하셨다. 욕쟁이 우리 담임 선생님은 수업중에 부서진 의자의 막대기를 떼내어 학생을 때려서 심의위원회에 부쳐지고 마침내 담임에서 퇴출되셨다. 그런데 이상한 사춘기 여학생들이 담임을 복권시키라고 데모를 일삼았으니… 새로 부임한 초년병 여선생님만 중간에서 맥없이 철부지들의 반항과 눈흘김에 몸살을 앓으셔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인연인지 2학년때 다시 그 선생님 반이 되고 만 나.ㅠ’ㅠ 제일 인상에 남은 한 사건. 일어 문과반에 남자 삼총사 선생님이 계셨는데 매번 문예실에 모여 음담패설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어느날, 예쁘지 않은 아이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그 삼총사가 예쁜애들만 지나치게 편애한다는 것이 이슈였다. 그런데 삼총사중 한 선생님이 우리 반에 들어와서 너무도 당당하게 한, 두 아이를 일으켜 세우시더니 “자 봐라. 얼마나 예쁘냐? 예쁜 꽃에 눈길이 머무는 것은 당연하거늘…” 하시는 게 아닌가! 허걱!! 암튼 내 고교시절은 총천연색 다양한 해프닝의 장이었다. 주로 수업시간에 집중해 듣는 것으로 학업을 성취하던 나는 급기야 성적에 깜빡깜빡 빨간불이 켜졌다.

간혹 어떤 이들은 성적 저조는 오직 학생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학교의 운영방침과 선생님의 열의와 질에 따라 아이들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학교의 시설과 교사들의 열의부족으로 양질의 교육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실은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 없이 불공평하다. 학교에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능력이 없다면 아이들을 위해 국가에서 나서는 것이 당연하리라.

미 교육장관 안 덩컨은 말했다.

“어린 학생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일생에 단 한 번뿐입니다.”

미국은 현재 획기적인 교육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학교 자율화(커리큘럼 자율화), 학교·교사 평가, 교사 성과급제 도입’ 등이 그것이다. 노력하는 교사들을 격려하고 무능한 교사들의 해고를 불사한다. 몇달 전 워싱턴주 교육감인 미셀 리가  388명의 교직원을 해고해서 법정공방까지 치달았으나 법은 무능한 교사들의 탄원을 들어주지 않고 미셀 리의 판정승을 선포한 바 있다. 안덩컨 교육장관은 훌륭한 교장은 보다 나은 교사를 발탁할 수 있고 그들을 교육시킬 수 있다면서 좋은 교육의 열쇠를 ‘교장의 능력’에 둔다는 발언을 하여 논쟁이 되기도 했다. 생생한 체험의 산증인인 나는 그 말에 절대 공감한다!! 우리의 'ㅇ'교장선생님 이하 일어문과반 선생님들께는 상당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

헬렌 켈러, 미켈란 젤로, 알베르 까뮈… 그들의 배후에 훌륭한 스승이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의 역사 속에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선생님들께서 그 사실을 염두에 두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