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 밤의 우리집 거실 정경

“여보, 나 떨려”

며칠 전, 김연아의 올림픽 쇼트 프로그램 일정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하다 나는 불현듯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김연아가? 아참, 김연아 맞네!”

또 허섭한 남편의 농담에 쓴 웃음을 지었지만 웬일인지 나는 정말 떨고 있었다. 한국인이란 이유로? 외국사는 애국자라서?(나는 나를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동명이인이라서 더? 뭐,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떨리기까지 하는 건 좀 오버란 생각이 들긴 들었다.

TV를 사? 사려면 빨리 사버려? 곧 세금환급이 있다며,삼성 LCD 40인치의 구매자평이 장난 아니라며 잔뜩 바람을 넣은 남편 탓도 있지만 아무튼, 평시엔 콧방귀도 안 뀌던 ‘TV구매’에대해 이토록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여자싱글 피겨스케이팅’ 때문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 참에 TV도 사고 케이블도 신청해 버려? 혼자서 일을 저지른 후, 기뻐 날뛰는 가족들한테 선심 쓴 척 유세를 떨어도 되겠다. 우리집 TV는 10년 반 된 브라운관 TV. 우리가족의 도미사(渡美史)와 역사를 같이한다. 방송수신이 디지탈로 바뀌면서 set-top box를 연결했는데 이제는 두어군데만 수신이 잡힌다. NBC나 채널 4?에서 23일 동부시간 8시에 중계 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정보를 알면 뭐하나? 골동품같은 TV 리모콘을 꾹꾹 눌러대며 한숨만 흘린다. 돈을 규모있게 써야지. 사야 할 것중 제일 가치없어 보이잖아!, 라고 말했던 죄지 뭐…

올림픽이 시작되자 인터넷 FREE TV 웹사이트를 발견해 한국 역사상 유래없는 스케이팅 쾌거를 손에 땀을 쥐어가며 시청할 수 있었건만 여자싱글 피겨 D-day인 오늘은 그 사이트와 접속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하필이면 사이트 헌팅 담당인 남편이 늦게 오는 날일세...... . 컴퓨터 다루는솜씨가 엄마보다 나은 큰 아이를 동원해 여기저기 찾아보지만 헛수고. 나중에는 작은 녀석까지 합세한다. 제가 무슨 구원자나 되는 것처럼 거룩한 표정을 하고, 무언가 뾰쪽한 수가 있는 것처럼 거드름 피우면서 구글창에 더듬더듬 아는 글자를 다 쳐넣는다. Olympic, skating, MBC… MBC아니고 NBC거던? 작은 넷북 앞에서 서로 머리를 들이대며 실갱이하는 우리 세 모녀를 누군가 바라본다면 ‘가관’이란 표현을 쓰고 말리라.

오호호, 그래도 노력하는 자에게는 결실이 따르는 법! 드디어 생중계 사이트를 찾아내었다. Thank God!! 이 없으면 잇몸으로,란 말을 사랑한다! TV가 없으면 요렇게라도 보면 되는 것이다. 물론 연속 스틸사진을 이어놓은 듯한 화면의 진행에 가끔 놓치는 장면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뱅쿠버 실황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남들도 떨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하면서 작은 넷북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컴맹에,덜 떨어진 엄마, 열심히 인터넷 서칭해준 후 김연아 경기만 보겠다며 물러가 헤드폰 끼고 숙제하는 큰 딸, 넘어지는 선수들의 안타까운 실수에 오~ 하고 애닯은 한숨을 내뱉다 잠에 곯아떨어진 작은 딸. 우리집 거실에선 2월 23일, 2010년 겨울의 한 밤이 그렇게 새겨지고 있었다.

드디어, 김연아의 경기. 007 제임스본드의 테마곡에 맞추어 신들린 여신처럼 스케이트를 탄다. 반박자, 이분 음표가 도록도록, 아이스링크를 구른다는 착각이 일정도로 음악과 하나가 되어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펼친다. 돌고, 미끄러지고, 점프하고, 나래를 퍼덕이며 2분 48초 동안 세계인을 꼼짝없이 사로잡는다. 가관을 연출하며 컴퓨터 앞에서 씨름해야 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했던 우리 세 모녀의 시간은 그렇게 감동을 전해주며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