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미묘했던 일본 엄마들과의 런치시간

IKY씨는 아이들끼리 한 반이라 알게된 일본인 친구이다. 우리는 애들 학교 도서관에서 같이 자원봉사를 하는데 그 시간이 점심 때라 자주 런치회동^*^을 한다. 한국 음식점에도 가고 IKY씨 집에서 일본음식도 대접받고, 어느날 나는 그냥 소박하게 컵라면에 있는 반찬을 꺼내놓았는데 그날이후로 더 편한 사이가 되었다.

며칠 전, IKY씨로부터 런치초대를 받았는데 그녀의 딸 루나가 고열로 의식을 잃어 응급차에 실려가는 바람에 취소가 되었다. 나는 깜짝 놀라고 애처로워 어쩔줄 몰랐지만 위기를 잘 넘긴 IKY씨는 어눌한 영어실력으로 911의 구조요원과 연락을 취했다면서 신나게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그때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혼났다고도 했다. 그 심정, 차고 넘치도록 이해가 간다. 평시엔 아이가 무엇이든 좀 더 잘 해주기를 바라면서 욕심부리며 살지만 덜컥 아프기라도 하면 회개하 듯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그저 건강하면 되겠다고 간구하는 것이 부모마음이니까. 눈물이 쉼없이 흐르더란 말에 나까지 울컥했고 힘든 시간을 보냈을 IKY씨에게 따뜻한 밥이라도 해주고 싶어서 당장 집으로 초대했다. 막 일본에서 돌아온 NK씨도 함께 오기로 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서둘러 저녁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8시부터 여자피겨 프리스타일 결전이 있는 날이다. 이틀동안 추적추적 비가 쉼없이 내렸는데, 눈 아닌 것에 감사했더니 밤이되면서 스톰이 들이닥쳐서 전기가 자꾸 나갔다 들어왔다 했다. 어렵게 연결한 올림픽 생중계 웹사이트가 접속불량으로 자꾸 끊어지고 나온다 싶으면 전기가 나가서 성질을 박박 돋구었다. 자식들 보는데 체통을 잃은 채(원래 체통을 차리지 않지만서두) 욱,하고 떠오르는대로 컴퓨터에 욕을 뿌려대며 끊어지면 연결하고 또 연결했다. 건너편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던 두 딸은 엄마의 ‘생 쑈’를 재미나게 구경하면서 지들끼리 키득댔다. 사정을 안 남편이 하던 일을 접고 집으로 달려올 무렵, 바깥 바람은 극에 달한 채 이 땅을 흔들어 댔던가 보다. 집도 자동차도 나무도 전깃줄도 강타 당해 다음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는 이러다 유리창 뚫리겠네,라며 흘끗 창문 한 번 쳐다본 것이 전부였다. 내 신경은 오로지 피겨스케이팅에 가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광 팬이 된거야? 이건 다 김연아 때문이란 생각을 했는데 결국 그녀는 그 날 모든 한국인에게 승리의 쾌감과 감격과 환희의 눈물을 선사했다. 또 전기가 나가서 결국 김연아의 열연을 전부 감상하지 못했지만 세계 기록을 갱신한 높은 점수를 확인한 순간 그날 밤 쌓인 스트레스와 짜증은 풀풀풀 멀리멀리 날아갔다. 그러자 졸음이 쏟아졌다.

다음날, 다섯가지 곡식을 섞어 밥을 짓고 굴비 굽고 미리 준비해 둔 해파리냉채를 무치고 만두도 튀기고… IKY씨는 갈은 무를 얹어 폰즈를 쳐서 먹는 미니 햄버거를 가져왔고 NK씨는 디저트를 준비했으니 꽤 화려한 상이 차려졌다. NK씨 남편이 아침에 나가면서“저녁은 또 오차즈케(찬 밥에 차를 말아서 먹는 밥)겠군!”이라고 했다는 소리를 들으며 와락, 웃을 때까진 평온한 분위기였다(보통 아잠마들은 내 배가 부르면 식사준비를 소홀히 한다 ^*^). 하지만 결국 어젯밤에 벌어진 양 국간 결전에대한 이야기가 안 나올수 없었던 것이다. 봤어요? 응 봤어요, 하는 말끝에 “연아씨 금메달 축하합니다.”란 인사를 받은 것만해도 동명이인이 겪는 귀여운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본 언론이 김연아 연습장면을 열심히 찍어다가 온갖 방정을 떨어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그런 방송이 일본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실감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들은 과거 1인자였던 아사다 마오에대해 추억하느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마오를 라이벌로 의식하고 노력을 했기에 김연아의 현재가 있지 않겠냐, 트리플 엑셀을 성공시킨 기술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마오가 실패했다, 등은 일본언론의 과대포장으로인해 아직도 마오가 세계 정상에 있다는 사고에서 비롯된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오가 실패해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는 말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건 금메달 획득에 실패했다는 소리인데, 내 상식으로는 명실상부 세계 1인자로 공인된 사람이 실전에서 실수를 범해 메달을 따지 못했을 경우에 쓸 수 있는 표현인 것이다. 사실 그런 비운의 피겨 레전드들이 있다. 나는 틀린 말을 듣고만 있지 못하는 그 놈의 성질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야 말았다. 결국 격의없이 컵라면을 먹으며 허심탄회함을 느꼈던 관계도 한일간의 벽 앞에선 무기력을 느낀다. 평시엔 원수처럼 으르렁 거리는 사이라도 한국 선수의 승전 앞에서 얼싸안고 하나가 될 수 있는 힘, 그런 것이 조국의 힘이리라.

김연아는 아사다마오는 자신의 라이벌이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노력했을 뿐, 사람을 라이벌로 삼지 않았다고 했다. 이 얼마나 의젓하고 훌륭한 철학인가!  3위인 로셰트가 화들짝 기뻐하며 올림픽 경기 며칠 전에 돌아가신 엄마를 추억하는 아름다운 눈물을 흘린 것에 비해, 2위를 하고서도 침통한 얼굴을 하고 분한 눈물을 흘리는 그녀는망언이 만발하는 언론의 피해자임에 틀림없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국민은 물론 장본인에게까지 꿈만 꾸게 만드는 거품은 결국 방울이 터지는 순간 처참함만 남는다. 그래서 은메달을 따고도 실패란 소리를 하고, 슬픈 것이다. 아사다마오는 충분히 아름답고 탁월한 피겨선수이다. 그녀 역시 세기의 재능꾼임에 틀림없다. 단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마음을 비웠다면 은메달이란 커다란 영광에 그저 감사하며 행복할 수 있었으리라.

사람의 뇌란 자꾸 듣다보면 세뇌를 당하기 마련이다.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사이에 몹쓸 입방아가 끼면 그들은 악연으로 추락한다. 개인이든 언론이든, 두 아름다운 스케이트 여신들을 비교하고 묶어서 시기와 질투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일, 그만 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