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하나의 상념

나이 드니 젊음을 잃는다. 내 나이 마흔 하나라 그렇다. 스물 하나라면 젊음을 꽃피운다는 표현을 쓸테지… 서른 하나라면 젊음이 원숙해 진다고 말할 터이고… 마흔 하나는 씹을수록 씁쓸한 맛이 배어나오는 도라지같은 숫자. 젊음의 막바지에서 앞으로 늙는 일이 남았다.

옛친구를 십수년만에 만나기 전까지 나는 불혹의 나이에 내 눈꼬리에 주름선이 잡혀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날 밤, 거울을 쳐다보면서 문득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탄력이 떨어진 눈가는 웃을 때마다 길고 도드라진 굴곡이 드러났다. 못 만나고 살았던 세월이 날아가지 않고 야속하게 친구의 얼굴에 들러붙은 걸 보았을 땐, 그 놀라움과 서글픔만으로 버거워 딴 생각을 못하였다. 문득 생각이 미쳐 얼굴을 바투대고 옆 눈을 흘겨가며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뿔사, 내 눈가에도 서너개의 길고 짧은 선들이 선명히 존재했다. 웃고 있지 않은데 주름이 보이리란 생각을 해 본적 없었으므로 이건 쇼크였다.

숫자 계산이 느려지고 기억력이 폭락하고 정확한 단어대신 그거 그거,를 문장 사이에 끼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진행된 노화련만 눈으로 직접 증거를 본 후에야 늙는다고 깨달으니 참 둔하고 어리석다. 그렇지만 나이들면서 느는 것이 주름과 건망증뿐이라면 그 서글픔을 어찌 달랠까. 다행히 좋은 변화도 있으니, 그건 바로 세월속에 쌓이는 지략과 혜안이다. 중요한 것을 진실되게 알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세월없이는 누리지 못할 혜택이었다.

예를 들자면,

나이가 드니 껍데기가 거추장스러워진다. 외모, 허세, 치장, 체면… 그런 것들이 하찮게 여겨진다. 한 때 나는 얼마나 남자의 외모에 큰 비중을 두었는지 모른다. 지금 같으면 더운날, 처음 만난 여자에게 부채질 해주는 남자의 성품에 반할터인데 그때는 어리석게도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 아무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이제 남자의 외모 따위는 내게 큰 감동을 주지 않는다. 껍질을 뚫고 들어가 속 알맹이를 볼 줄 아는 혜안이 생긴 것이다.

외모중심의 아이돌그룹보다 안면근육에서까지 소리를 뽑아내는 듯 노래를 하는 SG워너비가 좋고, 내노라하는 패셔니스타의 댄디룩이나 액서사리보다 고현정의 소름끼치도록 물오른 연기력에 빠져들고, 생각없이 팔랑팔랑 넘어가는 칙릿(chick-lit)소설보다 한장에 한 문장쯤은 밑줄을 긋고 되짚어보게 만드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탄복을 하고, 무아지경에 빠져서 젊음과 정열을 바친 후 세계 정상에 우뚝 서는 이들의 성공담을 접하면 손바닥이 뜨거워지도록 박수를 치고싶어지는 것. 나이가 들면서 생긴 현명함의 증거이다.

포장이 필요없는 알맹이 알찬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건 내 나이 마흔 하나라서 인가보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