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파티

5월 중순부터 말경에 공원같은 곳에 가면, 과연 대학 졸업시즌답게 여기저기서 학사모 쓰고 가운 입은 학생들이 가족에게 둘러싸여 사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늠름하고 대견한 분위기가 흐르고, 회심의 미소가 특히나 넘쳐나는 중년의 사람들은 아마도 부모님일거라고 추측한다. 세상 어느 곳에서든 자식이 멋지게 성장해주면 부모는 자랑스러워 어쩔줄 모르니까. 대학에 다니는 동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졸업이 불가능한 미국시스템이므로 졸업의 관문을 통과하는 자체가 커다란 안도와 행복을 안겨주는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한국이라면 ‘학번’이라고해서 입학한 연도로 자신을 소개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항상 졸업연도를 언급하는가 보다.

이번에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하였다. 기쁘게도 남편의 제자중 한 학생이 자신의 졸업파티에 우리 가족을 초대해 준 것이다. 처음엔 조촐하게 양 가족이 식사를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많은 친척과 친지들이 모인 자리였다. 베트남아메리칸 학생인 관계로 베트남 레스토랑에서 온통 베트남 사람들에 둘러싸여 베트남 노래를 들으며 베트남 음식을 먹게 된 아주아주 특별하고 재미난 시간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홀이었지만 빽빽히 들어찬 테이블과 의자마다 지정된 손님들로 가득차서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맛나게 무르익었다. 남편이 그의 부모님께 아들이 아주 똑똑하며 성실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장면을 보면서 아마도 최초로 진짜 선생님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집에서는 아이들을 껴안고 뒹굴기만 할 뿐, 교육과는 담을 쌓은 아빠라 평상시 도저히 교육자로 인식할 수 없었던 탓. 요리사인 아빠가 집에서는 먹기만 고집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지도… 그러자 아이들 교육을 나몰라라하는 남편이 조금 덜 얄밉게 느껴진다.

그의 귀여운 제자는 친구들과 누이가 동석한 테이블에 우리 자리를 마련해주고 베트남어가 나올 때면 통역을, 음식이 나오면 열심히 권해주고, 빈 술잔을 채워주면서 아주 사려깊고 정중하게 선생님을 예우했다. 이런 상황, 이쁜 제자를 사위삼고 싶어하는 세상 아버지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처음 참석해보는 졸업파티라 매사가 흥미로웠는데 그래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주인공인 졸업생은 할머님, 부모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특별 손님인 god father, 신부님, 스승을 가족,친지께 소개하고… 자신이 대학생활 4년동안 슬럼프에 빠지거나 기분이 저조했을 때마다 극복의 비결이 있었는데 바로 어머님의 음식덕이었다고 언급해 청중들의 따스한 웃음을 자아내고… 어머님께는 포옹과 뽀뽀를 하더니만 아버님께는 말로만 인사를 하고마니 짓궂은 친구들이 ‘아버님께 키스를!’이라고 외쳤다. 딸들은 몰라도 다 큰 아들이 아버지한테 뽀뽀하는 장면은 쬐금 동양인 정서에 안 맞긴하다! 그 아버님은 실로 몇 년만에 아들의 뽀뽀를 받으신 걸까? 살짜기 당혹스러우신 듯, 감회가 새로우신 듯, 굵은 주름이 함박웃음으로 흠뻑 굴곡졌다. 아버님은 답례의 인사말씀으로 “내 아들이 어떻게 4년만에 졸업할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고 해서 홀 안은 다시 웃음바다가 되고...

흐뭇한 감사의 향연이 끝나자 기대하던 만찬시간이 되었다. 보도듣도 못한 진귀한 음식들이 쏟아져나오니 매일 먹던 것만 해먹고 살면서 별식기근(別食飢饉)에 시달리던 내 삶의 애상(哀想)이 시원하게 박살났다! 정크푸드만 빼고 무엇이나 잘 먹는 나는 여덟가지나 되는 정체 모를 음식이 차례로 서빙되는 동안 최근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감상과 더불어 슬슬 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건 마시지도 않은 술기운이 아니었다. 치어스!를 연발하는 젊은이들 틈바구니에서 분위기에 취하고, 한 쪽에 마련된 무대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대는 친척아이들의 흥에 취하고, 오랜만에 맛보는 일가친지 모임만의 특유한 느낌, 그 포근함, 그 끈끈함… 그 냄새에 취한 것… 취기를 핑계삼아 나는 먼 옛날로 추억여행을 떠난다. 내 졸업식 날에도 이런 정겨움이 득실거렸더랬다. 시골에서 올라오신 친할머니, 할아버지, 잔뜩 꼬부라진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하신 외할머니, 외삼촌, 숙모들, 고모, 이모와 사촌들… 작은 폭죽이 터지고 꽃다발과 선물은 짧은 팔로 다 그러안지 못할만큼 넘쳐났거던… 학교 교정 안에서 나만큼 대식구의 축하를 받는 아이도 없었을 것이다. 축하해 주러 온 옛친구는, 어떤 대군단이 참으로 요란뻑적도 하다했더니 그게 너희 식구들이지 않겠니,했더랬다. 그땐 그렇게 바글바글하게 살았거늘…

미국땅에서 이렇게 달랑 네식구만 살면서 문득문득 사무치게 치밀어오르는 그리움…… 그 감정이 뭉텅뭉텅 올라와 자칫 대조적으로 외로울 수도 있는 자리였지만 생면부지의 친척까지 다가와 우리에게 따스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니 비록 남의, 그것도 타민족의 친인척들 틈바구니였지만 끈적한 사랑을 한껏 공유할 수 있어서 어찌나 행복하던지…

너무도 특별했던 만찬에 감사하며, 졸업파티의 주인공인 폴군과,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졸업생들의 밝은 미래와 진정한 젊음을 위하여, 잔을 높이 들고 외쳐본다, 치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