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철학

배추 한 포기가 젖살오른 갓난이만하다. 가운데 칼집을 넣고 양 손아귀에 힘을 주니 단단한 배추가 주욱 찢어진다. 겉잎은 초록이요, 꽉찬 속이 노랗다. 농부의 아내처럼 미소가 절로 터진다. 잘 영근 배추를 보고 달가울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 중 내가 끼어 있으니 고것이 약간 우습다. 시집올 때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겨우 밥 한가지였을 걸… 요리책 들여다보며 찌개라도 끓일라치면 두어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러던 새댁이 아줌마되어 김치 담글 배추 속 영근 것이 기뻐서 웃는다! 열무, 총각김치, 물김치, 깍두기… 할 줄 아는 것 참말 많아졌네… 상념이 속배추만큼 차오르지만 마냥 넋놓고 한가할 수만 없다. 빨리 김칫거리 절여놓고 작은 아이 학교에 가야한다. 처음 도우미하러 가던 날 아침에 ‘엄마가 학교에 왜 와?’ 하며 연거푸 물어대던 녀석, 막상 교실에서 제 엄마를 보며 어찌나 좋아하던지… ‘엄마, 에브리데이 오면 좋겠다’는 말이 아직까지 귓가에 생생하다. 하지만 내 맘 속엔 ‘오늘은 부디…’ 란 바램이 인다.

제 언니완 달리 킨더 전에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막내녀석은 영어가 서툴다. 담임선생님께 그러한 사정을 말씀도 드렸고 내 스스로도 정상참작을 하려 노력하지만 도우미를 끝내고 돌아 올 적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미의 마음이라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뒷전에 쳐진 과묵한 천사!

‘환경과 자연’이란 타이틀로 이루어진 특별수업 때는 더더우기 그러했다. 내게도 생소한 단어들이 나열되고 관련 내용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지만 많은 아이들이 손을 번쩍번쩍 들고 총명한 대답을 하여 칭찬받는 동안 유독 내 아이의 멀뚱거리는 눈빛을 바라볼 때의 기분이란… 씁쓸한 마음을 숨기고 시종일관 미소를 띄고 있었거늘, 어려도 속은 있는지라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엉거주춤 다음 질문에 손을 들었다. 한 눈에도 엉겁결에 드는 손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조금 어이없기도, 안됐기도, 많이 미안하기도 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차에 올라 혼자가 되었을 땐 목울대로 뜨거운 기운이 밀려왔다. 엄마 앞이라 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아이의 마음… 제게도 자존심이 있고 칭찬에 대한 욕구도 있을진대 상황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혹 낭패감을 맛보지는 않았을까? 이런 환경을 만든 것이 엄마아빠라 생각하니 더욱 미안했다. 곧 역경을 극복하고 1,2년 후면 선생님 말씀 다 알아듣고 대답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자신에대해 커다란 성취감을 맛 볼 수 있으려니… 마음을 다잡지만 마음 한구석 안쓰러움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온 녀석을 으스러지도록 껴안은 채 ‘I love you’ 투성이 자작곡을 수도없이 되풀이 하여 주거니 받거니 했다, 아주아주 오랫동안……

(그림) Woodhill 6th Yoojin Kim

배추잎 한 겹 한 겹을 들춰 골고루 소금을 뿌리는 일이란 그리 녹록한 작업이 아니다. 김치는 가족에 대한 혹은 ‘드실 이’에 대한 사랑 없이는 만들지 못할 먹거리란 생각을 한다. 김치라고 다 같은 김치는 아닌 것이다. 산소가 부족한 고산지대에선 같은 솜씨라도 다른 맛이 탄생되고 숙성 온도에 따라서 감칠맛이 틀려진다. 가끔 손 많이 가고, 시간 더디게 걸리며, 게다가 발효과학이 깊게 작용하는 이 복잡한 먹거리에 매력을 느낀 외국인들이 레시피를 요구할 때가 있다. 난감하기 이를데 없다. 나도 어설픈데 누구한테 레시피를 전달하겠는가. 김치는 민감하고 성질 까다로운 미녀에 비할 음식, 정성을 바치면 더욱 훌륭해지는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그것이 아이를 키우는 일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한 겹 한 겹 아이가 성장의 옷을 입을 때 구겨지지 않고 구멍나지 않으며 아이 옷태의 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살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리라. 배추를 너무 절이거나 덜 절일 때 최상의 김치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과보호도 안 되고 방치도 안 되는 중도의 교육이 필요하리라. 그것이 어려운 과제다. 성숙한 부모 마음과 진정한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같은 레시피로도 다른 맛이 나는 것처럼 아이의 독특한 개성을 살리기 위해 더욱 섬세해져야 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일 것이다. 나는 가끔 칼릴 지브란의 말을 떠올린다. ‘너의 자녀는 너의 자녀가 아니다. 그들은 너를 통해서(through) 나왔지만 너로부터(from) 나오지 않았다.’ 내게 부모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 지를 일깨워주는 명언이라 자주 그 말을 되새기곤 한다. 내 입맛대로 물고기를 물려줄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세상으로 나온 인류가 현명한 낚시꾼이 되도록 보살피는 일이 진정한 부모의 과업일 것이다.

미숙한 엄마지만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진정한 철학이 있으니 내 아이는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리란 믿음을 가지자, 그러면 됐지 않은가! 어쨌거나 오늘은 선생님 질문에 손 번쩍 못 들고 말 유창한 친구에게 어눌하게 대답해도 안쓰러운 마음따위 갖지 말아야지… 내 미소가 진짜여야 아이 마음도 편할 것 같다!

등 두드려가며 손놀림 서두른다. 바이든의 모자철학처럼 김치될 배추잎에 소금 툴툴 뿌려가며 이 생각 저 생각하니 김치철학이 되버렸다.

ps. 2008년 12월 18일에 써 놓은 글을 올려봅니다^^. 미씨 여러분, 언제나 행복하세요!!